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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 71] 청춘의 문장들: 부제만 빼면 괜찮은 책
    행간의 접속/에세이/인물 2012. 11. 18. 23:30

     


    청춘의 문장들

    저자
    김연수 지음
    출판사
    마음산책 | 2004-05-01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소설가 김연수의 내면풍경을 담은 산문집. 작가의 삶 속으로 선명...
    가격비교

     

    작가 김연수가 자신의 삶 속에서 의미가 있던 문장들을 발췌해서 엮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목 밑에 부제로 "작가의 젊은날을 사로잡은 한 문장을 찾아서"라고 되어있기도 했으니까.... 아니, 작가의 삶에 영향을 미친 문장들이 도대체 얼마나 많길래 책으로 낼 수 있을 정도인가, 작가는 만날 이렇게 강한 인상만 받으면서 사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책을 읽을 수록 위의 부제는 틀렸다. 작가의 젊은날을 사로잡은 문장들이 아니었고, 작가의 젊은날을 얘기할 때 덧붙여 씀으로써 조금 더 빛나게 해주는 문장들이었다. 그 문장들이 아니어도 작가의 삶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래서 앞부분을 읽을 때에는 기대감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내용을 탓하며 이게 뭔가 싶었는데, 부제를 떨쳐버리자 작가의 삶이 서서히 들어왔다. 이전의 작가의 다른 책들(『여행의 권리』,『지지않는다는 말』)에서 느낄 수 있는 음울함 속의 재기발랄함이 엿보인 것이다.

     

    내가 삶이라는 건 직선의 단순한 길이 아니라 곡선의 복잡한 길을 걷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그때다. 그게 사랑이든 복권 당첨이든, 심지어는 12시 가까울 무렵 버스를 기다리는 일이든 기다리는 그 즉시 내 손에 들어오는 것은 하나도 없다. 효율성과 경제성의 시각으로 냉정하게 검토하자면 삶이라는 건 대단히 엉성하게 만든 물건이다. 원하는 모든 것을 원하는 순간에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깔끔할까?

     

    삶에 대해서 이렇게 철없는 생각을 하는 작가가 있을까 싶지만 그런 철없음 속에서 작가다운 면모를 발견하기도 한다. 삶은 엉성하다는 생각, 얼마나 참신한가? 그리고 나이대에 대한 날카로운 그의 성찰도 보인다.

     

    그 집의 식구들은 모두 스물넷에서 서른두 살 사이의 사람들이었다. 인생의 정거장 같은 나이, 늘 누군가를 새로 만나고 또 떠나보내는 데 익숙해져야만 하는 나이. 옛 가족은 떠났으나 새 가족은 이루지 못한 나이. 그 누구와도 가족처럼 지낼 수 있으나 다음날이면 남남처럼 헤어질 수 있는 나이. 그래서인지 우리는 금방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이처럼 친해질 수 있었다.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의 사람들을 그는 이렇게 말한 것이다. 만남과 떠남에 익숙해져야 하는 나이라고... 그렇고 보니 그 이전 세대와 그 이후의 세대들은 그런 것들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는 느낌이 들고, 결국 불안정한 그 시기의 원인이 이런 것에서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대중음악평론도 했다고 한다. 그가 쓴 대중음악평론은 읽어본 적은 없는데, 이전 글과 강연에서 음악에 대해 전문가 수준의 식견을 갖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 책에도 어김없이 음악에 대한 얘기들을 했는데, 80년대의 뉴웨이브 음악과 F.R.데이비즈, 배드 핑거 같은 영국 록 그룹, 수퍼세션의 알 쿠퍼 이야기 등을 언급했다. 비슷한 시기에 음악에 심취했던 나이기에 이런 뮤지션들의 이름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정이 이입되어 내가 그가 된 것 같고, 고등학교 시절의 나로 돌아간 것 같다. 본가에 있는 500장의 LP를 갖고 오긴 해야 할텐데....

     

    마지막으로 인용할 부분은 책을 읽으면서 오랜만에 웃은, 재미있는 부분이다. 군대에서 화장실 청소하면서 겪은 에피소드이다.

     

    "즐거워하되 음란하지 말며 슬프되 삼심에 이러지 말자."

     

    오줌이 묻는 양철 집게를 들고 서서 나는 웃었다. 한참 동안 웃었다. 웃음을 그치고 담배꽁초를 줍는데 다시 배시시 웃음이 터져났다. '이러지 말자'가 아니라 '이르지 말자'라고 해야 옳았기 때문이었다. 자꾸만 내 머릿속으로는 공자님이 이른 아침 왜 가야만 하는지도 모르고 가야만 하는 부대 화장실에서 집게로 담배꽁초를 줍는 내 소매를 붙잡고 '김 일병, 이러지 말자. 우리 아무리 슬프되 상심에 이러지 말자'라고 애원하는 광경이 떠올랐다. 알겠습니다. 공자님. 잘 알겠습니다.

     

    작가도 웃었지만 나도 웃었다. 공자님이 이러지 말자고 애원하는 광경은 상상만 해도 웃기다. 재미있거나 웃기는 책을 골라보지 않다 보니 책을 읽으면서 소리 내어 웃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이 부분만큼은 나도 웃었다.

     

    다 읽고나니 작가는 한시도 참 많이 읽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인용된 문장의 반 이상이 한시였는데, 톡톡 튀는 감각과 문장을 구사하는 나름 세련된 작가가 한시를 많이 읽었다고 하니 어울리지 않는 느낌도 들면서 나름 멋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믹스 매치 뭐 그런 것....

     

    부제만 빼면 괜찮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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