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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27] 여행할 권리: 문학과 경계에 대하여행간의 접속/여행 2012. 8. 16. 11:16
여행할권리김연수산문집 카테고리 지은이 상세보기 소설가 김연수의 여행글이다. 1999년부터 2006년 사이에 다닌 여행지 중에서 몇 군데를 뽑아서 쓴 글인데, 차례를 보니 연도순도 아니고, 장소순도 아니고... 글을 모아놓은 방식이 참 자유롭다. 그리고 여행의 목적들도 꽤 다양하다. 소설 창작을 위한 취재여행도 있고, 언어를 배우기 위해서 간 경우도 있고, 단순 관광도 있고,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 간 경우도 있고, 해외 문화재단에서 작가들을 초청하는 경우도 있고, 아버지 고향을 찾아 간 것도 있고, 다양하다. 다니기도 많이 다녔다.
글 쓰는 방식도 소설가라 그런지 생각도 깊고, 자료 조사도 풍부하다. 여행이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여정보다는 역시 감상과 생각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아마 여행들이 대부분 장기체류 여행이다 보니 그런 것 같다. 그 중에서도 인상적인 것은 작가가 경계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이었다. 중국 국경에 대한 얘기를 할 때도 그렇고, 이상과 김수영의 얘기를 할 때도 그렇고, 아버지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왔을 대의 이야기, 그리고 스웨덴에 입양된 작가 얘기를 할 때도 그랬다. 결국 국경이라는 경계에서 인식의 변화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 인간이 만들어놓은 한계가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한 것인데, 여행의 시차가 있었음에도 대부분의 글에서 일관되게 이 문제가 언급되는 것을 보니 작가의 관심이 지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관심을 갖는 부분은 역시 문학에 대한 것이었다. 특히 문학의 역할과 경계에 관해서... 먼저 문학의 역할에 대한 부분을 인용해본다.
정치적으로 봤을 때, 말할 수 있는 것들은 존재가 그 목소리로 증명된다. 반대로 말하지 못하는 것들, 즉 입술이 없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대신해서 말한다는 점에서 문학은 본디부터 정치적이다. 금문교를 바라보면서 나는 문학이란 그들을 대신해 소리를 내어줌으로써 그들의 존재를 입증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금문교가 있는 한, 누군가는 이민자들의 언어로 그들의 삶을 드러낼 것이다.
문학의 역할에 대해서 하나가 또 있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쓰게 될 때 우리가 쓸 수 있는 건 거기까지다. 혹시 한국에서 문학이 죽었다고 말하는 까닭은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쓰는 사람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문학이란 말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쓸 수 있을 때 죽어가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하면 우린느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써야만 하지 않을까?
정리하면 문학은 말할 수 없는 존재를 대신해서 말할 수 없는 것을 쓰는 것이라는 얘기다. 말할 수 잇는 존재는 그 자체로 존재를 증명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것을 쓰게 되면 거기까지가 한계라는 얘기이다.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경게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문학은 상상의 영역을 넓힐 수 있다는 얘기 같다. 문학과 관련해서 경계에 대한 얘기도 하고 있다.
이상이 말한 '나간다'나 김수영이 말한 '가야겠어요'란 똑같은 의미의 말이다. 그건 단순히 집을 떠난다는 게 아니라, 국경을 넘어 외국으로 간다는 이야기이며, 한편으로는 어떤 경계를 넘어간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그 방법으로 이상이 오들오들 떨면서 암흑 속에서 조금 더 앞으로 나가는 길을 택했다면, 김수영은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갔다. 두 사람은 결국 박인환처럼 국경은 넘어가본 일이 없지만, 박인환과 달리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가장 멀리까지 나가본 시인들 중에 속한다.
문학의 경계를 얘기하면서 문학의 의미와 경계의 문제를 함께 얘기하고 있고, 이상과 김수영이 문학의 가장 멀리까지 가서 그 경계를 넓혔다고 얘기하고 있다. 결국 말할 수 없는 이를 대신해서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했다는 얘기인 것이다.
김연수의 글은 처음 읽었는데, 깊이 있는 내용을 자신만의 독특한 감각으로 세련되게 얘기하면서 결코 무게를 잡지 않는 진중함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게 매력인 것 같아서 다른 책들도 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사람들 말을 들어보니 나처럼 이런 생각을 해서 김연수의 소설을 읽으면 후회를 한다고 한다. 산문과 소설의 문체가 너무 달라서....
이 책을 처음 잡앗을 때에는 여행에 대한 책이라고 생각하고 읽었지만 읽고나니 문학과 경계에 대한 책이었다. 그리고 '여행할 권리'라는 제목은 결국 문학을 할 권리라고 치환할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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