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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15] 고백, 손짓, 연결: 만화가 주는 것들행간의 접속/에세이/인물 2023. 5. 4. 14:24
책이름: 고백, 손짓, 연결
곁이름: 가혹한 세상 속 만화가 건네는 위로
지은이: 김민섭
펴낸곳: 요다
펴낸때: 2018.07.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를 쓴 김민섭 작가가 자신이 본 만화들에 대해서 쓴 책이다. 단순히 만화를 소개하는 것은 아니고 그 만화들이 우리 사회의 어떤 모습을 반영하고,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 쓴 것이다. 특히 그가 언급한 만화들이 대부분 웹툰이었는데, 83년생인 지은이 세대한테는 웹툰이라는 매체가 이전의 종이 만화보다는 훨씬 더 친숙했기 때문에 그렇게 선택된 것 같다. 이러한 웹툰의 창작 문법과 소비 방식 등에 적응하지 못한 만화가들이 도태되는 현상들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이들 만화들에서 가장 많이 얘기하는 것은 자기 동일시와 위로이다. 등장인물들의 상황과 심리를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위로를 받고 힘을 받았었다는 얘기이다. 『슬램덩크』를 예를 들면서 이런 얘기를 한다. 대학원 박사과정 중에 유난히 힘들었던 어느날 읽어야 할 논문이나 자료를 쌓아두고서 우울한 마음에 이 만화책을 들었다고 한다.
정대만이 안 감독 앞에서 무너지며 "안 선생님.... 농구가 하고 싶어요."하는 모습을 보면서, "교수님.... 논문이 쓰고 싶어요."하고 말하는 나를 동시에 떠올린 것이다. 방황을 겪고 돌아온 정대만과 자료를 독해하지 못해 논문의 진척이 없는 나를 동일시하기는 민망하지만, 그때는 괜히 농구와 논문을 대입시켜 ㅇ릭고는 울었다. 그러다가 곧 북산고등학교의 전국대회 진출기로 넘어가서 "그래, 난느 할 수 있을 거야.(천재니까.)"하는 강백호의 근거 없는 자신감에 위로를 얻고는, 잠들어 버렸다. 다음 날 잠에서 깬 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출근해서 학과사무실의 문을 열고, 조교 근무를 서고, 수업에 들어가는 일상을 계속했다.
만화가 힘이 되는 경우이다. 만화가 가르침이 되는 경우도 있다. 『미생』을 얘기한 경우인데, 지은이가 학회에 제출할 논문을 써서 선배 교수에게 검토를 요청했다. 정말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에 스스로 뿌듯해하고 있었는데, 선배 교수는 "너는 너의 논문이 스스로에게 설득이 됐니?", "그 동그라미 쳐 둔 문단에 대해 좀 설명해 줄 수 있겠니?", "너 스스로 설득이 안 된 논문이 무슨 가치가 있겠니?"하는 말에 도망치듯 나와서 멍하니 있다가 우울해지는 상황을 맞았고, 기분 번환을 위해서 웹툰을 보다가 『미생』의 한 부분을 보게 된다.스크롤을 휙휙, 내리다가 어떤 대사와 맞닥뜨렸다. "기획서나 보고서를 쓰는 이유가 뭘까요?" 말하자면 '글쓰기의 이유'에 대해 누군가 물었다. 장그래의 상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1. 설득해야 하니까
2. 여러 사람을 설득해야 하니까
3. 계속 여러 사람을 설득해야 하니까.
<중략>
장그래는 바둑을 연습생 시절을 회상했다. 그는 자신이 둔 수에 대해 설명해달라는 요청에 "요즘 연구생들끼리 자주 두는 수입니다."하고 답한다. 그러자 지도 교사는 "어차피 한 판의 바둑이라지만 바둑을 업으로 삼을 사람들으로서 연구가 덜 된 수를 실전에서, 그것도 연구생 리그에서 쓴다는 게 말이 되느냔 말이다. 너조차도 설득이 안 된 수에 상대가 어떻게 반응하겠어?"하고 묻는다. 그 부분에서 결국,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다. 한 편의 논문이라지만, 글쓰기를 업으로 삼겠다는 한 인간이 스스로 설득되지 않은 단어를, 문장을, 그 무엇을 써 낸 것이 너무나 부끄러웠기 때문이다.이후 지은이는 글쓰기의 이유를 통해서 의미를 찾고, 타인을 대하는 태도와 변화, 사유 등을 얘기한다. 결국 이 만화가 지은이에게 이러한 깨달음을 준 것이다.
그밖에 『마음의 소리』에서는 아버지 세대의 권위를 읽었고, 『웃지 않는 개그반』에서는 가해자들이 반성하지 않고, 사과하지 않는 사회 풍조를 비판한 것을 언급했고, 『플랫폼들』에서는 기본적인 맞춤법도 지키지 못하는 새로운 매체의 문제를 언급했고, 『드래곤볼』에서는 정의를 혼자서 이루지는 못하지만 연대의 힘으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언급했다.
나는 만화를 보지는 않지만 이런 얘기들을 듣고 있자니 한 번은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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