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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8] 가능한 꿈의 공간들: 생각이 넓어지는.행간의 접속/에세이/인물 2023. 4. 17. 11:45
책이름: 가능한 꿈의 공간들
지은이: 듀나
펴낸곳: 한겨레출판
펴낸때: 2015.04. (전자책)
듀나라는 SF 작가의 에세이인데 주로 영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생각과 발상이 자유롭다. 영화에 대한 칼럼이라기보다는 영화를 통해서 생각할 것들을 얘기하는 것인데, 그 생각할 것들이라는 것이 남들은 정말 관심을 갖지 않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인데 얘기를 듣고 보면 이런 생각을 우리는 왜 하지 못했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들이다.
아역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서 얘기한다. 보통 아역 배우들의 연기라고 한다면 아역이지만 성인 배우만큼 능숙하고 극을 잘 이해하고 경탄스럽게 잘 한다는 얘기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지은이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다른 차원을 이야기한다.
아이들의 세계를 그리는 영화가 정확히 어른의 영역도 아니고 아이의 영역도 아닌 중간세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스스로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수 없다. 영화를 만드는 어른들은 왜곡되고 흐려진 자신의 기억과 관찰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훌륭한 어린이 영화가 나오려면 감독과 작가와 아역 배우가 이 중간세계의 탐험자가 되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이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세계를 이해하기는커녕 서로를 이해하는 것도 힘들다. 그런 와중에도 종종 아름답고 진실한 무언가가 나오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건 쉽지 않다.
아역 배우가 그리는 어린이의 세계에 접근하는 방식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역 배우의 연기가 어색하면 연기력을 탓했지 어린이의 세계에 대한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은이는 진실되고 아름다운 무언가를 느끼게 하는 아역 배우의 연기와 그 연기를 끄집어내는 감독과 작가를 이야기하면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중요하지 않은 것 같지만 중요하다.
영화 <건축학 개론>을 '추억의 잔혹극'이라고 말한다. 이건 무슨 말일까?
수지와 이제훈이 나와 90년대의 과거를 재현하고 당시 인기였던 노래가 나온다고 해서 눈에 반짝반짝 별을 박고 향수에 빠지는 꼬락서니를 못 봐주겠다. <건축학 개론>이 좋은 영화라면 그건 <기억의 습작>을 들으며 감상에 젖어있는 주인공들의 외피 밑에 숨겨진 잔인함, 비열함, 어리석음, 비겁함을 가차 없이 폭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이 이야기를 쓰고 연출한 감독마저도 자기가 얼마나 잔인한 이야기를 했는지 제대로 모르는 것 같으니 이를 어쩌면 좋은가.
잔인함, 비열함, 어리석음, 비겁함을 폭로한다고? 지은이의 얘기는 이렇다. 서연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은 술이 취해서 강남 선배한테 성폭행을 당한 것인데 승민은 자신을 보고 "쌍년"이라고 부르면서 자신의 비겁함과 어리석음을 뭉개고 있고, 성인이 되어서도 사과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남 선배한테 성폭행 당하는 것도 분명히 범죄인데 이를 문제시 해야 한다고 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본적 없다. 90년대의 추억을 정말 아련하게 그려서 느낌이 있다고 생각했지 그 밑에 깔린 모습을 끄집어 낼 생각은 못했다. 이런 생각을 대부분의 관객과 감독조차도 못했기 때문에 폭로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고, 깔려 있다고만 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아무튼 이런 관점은 중요하다.
영화 속의 책장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영화 속에서 인물의 성향을 알아보는 방식의 하나로 들고 있는 책이나 방의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보면 알 수도 있는데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영화를 보지 못했다는 이야기이다. 하물며 문학소녀나 문학소년이 주인공인 작품이나 책을 중요 소재로 삼고 있는 작품에서도 책의 중요한 역할을 부여하지 못해서 겉으로만 화면을 채우는 소도구로만 존재하는 것을 문제 삼는다.
영화나 드라마를 위해 책을 꽂는 데에는 기술이 필요하다. 먼저 책장 주인의 관심사를 알아야 하고 성격을 알아야 한다. 포인트를 잡아줄 특별한 책들의 리스트를 선정해야 하고 이들을 배치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당연히 작가나 연출자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 미술팀이 아무 책이나 마구 꽂아 부피를 늘려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왜 당연한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없지?
영화에서 책은 소품이지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소품이다. 이야기를 품을 수도 있고..... 이런 것까지 세세하게 신경쓸 수 있는 소품이나 미술 담당자가 있어야 하고, 아니면 작가나 연출자라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얘기이다. 그렇게 되면 작품은 한 단계 더 올라갈 수 있을 것 같다.
외화 번역의 성차별도 얘기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왜 여성만 남성에게 존대를 하느냐는 것이다. 인물 간의 관계에서 존대를 할 관계가 아닌데도 말이다. 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했을 때 그때서야 문제임을 인식했지만 이 관습이 고쳐지는 것은 쉽지 않았다고 한다.
공룡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것에 대해서 얘기한다. 온라인 서점에서 공룡에 대한 책을 검색해 보면 성인용은 별로 없고, 대부분이 어린이 대상이라고 말하면서 공룡으로부터 우리가 배운 것들에 대해서 얘기한다.
어른이 되어 공룡을 잊는 게 뭐가 그렇게 딱한 일이냐고? 한번 여러분이, 아니 세상이, 공룡을 통해 배운 것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라. 대부분 사람들은 공룡에 관심을 가지면서 1억이라는 숫자를 배운다. 나만 해도 어렸을 때 1억보다 작은 숫자는 숫자 같지도 않았다. 아이들이 지질학과 고생물학, 지구과학에 관심을 갖는 것도 모두 공룡 때문이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개조되는 공룡에 대한 이론을 보면서 과학이라는 것이 종료와는 달리 꾸준히 변화하고 발전한다는 사실 역시 배운다. 공룡 이야기는 문학적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공룡을 통해 자연의 무자비한 법칙과 모든 힘 있는 자들에게 언젠가는 다가올 필연적인 종말에 대해 배운다. 이 거대한 동물들에 대해 잠시 관심을 쏟는 동안 아이들의 시공간은 엄청난 속도로 확장된다.
나는 어려서도 공룡에 대해서 그렇게 관심을 갖지 않았는데, 생각해 보면 지은이의 생각도 타당한 것 같다. 그리고 괴물에 대해서도 얘기한다. 괴물은 과학적으로는 그 존재가 밝혀지지 않았는데 우리는 존재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유치원 정도의 아이들은 '괴물 놀이'라고 하면서 잡기 놀이를 한다. 이렇게 우리가 괴물의 존재를 믿는 경향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에 대해서도 얘기한다.
아마 우리는 이득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원래 본성이 그렇기 때문에 괴물을 믿는 것일지도 모른다. 잊었는가? 인간이라는 동물은 아주 최근까지 괴물들의 세계에서 살았다. 자신을 노리는 천적이 구체적으로 어떤 존재인지 완전히 깨달을 수 없었고 고향인 아프리카를 떠나 세계 곳곳으로 흩어진 뒤로는 늘 새로운 천적을 만났다. 자신들을 노리는 괴물의 존재를 믿는 것은, 어떻게 보면 생존과 직결되는 것이었으리라. 우리를 매료시키는 괴물들이 대부분 육식성인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서 생각을 확장하는데 그것은 바로 "괴물들이 주변에 존재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종이 공존하는 세계가 '정상'이며 지금의 세계가 '비정상'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괴물을 꿈꾸는 마음으로 개발을 억제하고, 멸종된 종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을 얘기하는데.... 살짝 너무 나갔다고 생각할 찰나 지은이는 증언한다. 태즈매니아 호랑이가 멸종하자 호려 영화의 괴물로 등장하는 것을 봤을 때, 우리가 꿈꾸는 괴물은 과거의 유령이 아니라 멸종 위기에 빠진 생물들의 미래를 예견하는 것이라고.....
지은이의 생각이 정말 독특해서 재미있고, 생각이 넓어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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