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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25] 누가 봐도 연애소설: 적절하게 제공되거나 적절하게 제공되지 않거나행간의 접속/문학 2020. 12. 27. 23:29
책이름: 누가 봐도 연애소설
지은이: 이기호
펴낸곳: 위즈덤하우스
펴낸때: 2020.07.
연애와 관련되는 짧은 소설들을 묶은 책인데, 단편소설보다도 더 짧은 소설들이다. 어린이의 연애, 청소년의 연애, 청년의 연애, 중장년의 연애, 노년의 연애 등 세상 모든 연애들의 한 장면들을 모아놓은 것 같다. 그 중 인상적인 작품들을 뽑아보았다.
「삼각김밥보단 따뜻한」은 남자친구와 결별을 선언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부모님의 편의점에서 일손을 도우며 지내고 있는 나와 편의점 옆 김밥집 사장으로 나를 따뜻한 김밥으로 묵묵히 위해주는 용성의 이야기이다. 결별한 남자친구 정우가 내려와서 다시 결합하자고 찾아왔는데, 하필 용성의 김밥집에 정우가 의도적으로 데리고 들어갔기에 이리저리 눈치를 보는 내적 갈등을 겪는 내가 과감하게 자신을 위하는 용성을 선택하는 이야기이다. 인상적인 장면은 마지막에 그 김밥집에서 정우에게 "꺼져, 새끼야."라고 욕을 하면서 내치는 장면이다. 내적 갈등이 시원하게 해소되면서 욕이 주는 폭발성이 쾌감을 일으킨다.
「어떤 별거」는 대학교 앞 원룸촌으로 가출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이다. 아들 태민은 아버지를 찾아가 화해하시고 집에 들어가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거절하면서 어머니의 관절염 약을 챙기고, 어머니에게 그 약을 전하면서 화를 푸시라고 했더니 아버지를 욕하면서 아버지가 전립선 약으로 먹는 귀리 선식을 챙겨주는 어머니를 그리고 있다. 서로에 대해서 화가 나있지만 그놈의 정 때문에 서로를 본능적으로 위하는 노년의 사랑을 그리고 있다.
이런 장면을 우리 집에서도 본 적이 있는데, 어머니가 아버지와 크게 싸우면서도 밥은 챙겨주시는 모습을 기억한다. 그 때 어머니께 아버지와 그렇게 싸우시면서 왜 밥은 챙겨주시냐고 여쭤보니 싸운 것은 싸운 것이고, 밥은 차려줘야 한다는 말씀에 약간 웃음이 나왔었다.
「개만도 못한」은 동거를 하다가 헤어졌는데, 그 때 함께 키우던 강아지를 경제적 문제 때문에 더이상 키우지 못하게 되자 헤어진 연인에게 개를 맡아달라고 연락하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웃기는 장면은 마지막이다. 여자가 개를 데려가니까 남자가 소리친다. "나도 데려가야지!" 그러나 여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던 길을 간다. 결국 그는 개만도 못한 남자가 된 것이다. 제목이 다른 제목이었으면 마지막 장면이 유머스럽지 않았을텐데, 제목이 재미를 배가시켜주는 작품이다.
「독감」은 아내와 별거하고 홀로 초등학교 3학년 딸을 키우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딸이 독감에 걸려 집에서 혼자 격리하고 있는 상태에서 전화도 받지 않아 너무 걱정되어서 조퇴하고 집에 갔더니 같은 반 남자 애와 노트북으로 유튜브를 보는 장면을 목격한다. 남자애는 병문안을 왔다고 하자 접촉하면 안 되는 병이라 다음에 오라고 보냈는데, 딸이 쓰던 마스크를 갖고 갔다면서 자기를 좋아해서 같이 아프려고 한다는 말을 듣는다. 너의 아픔을 함께 하고 싶다는 사랑의 마음이 위트 있게 잘 그려졌는데, 그 주인공들이 초등학생이라서 더 돋보인다.
「102호 그 여자, 302호 그 남자」는 102호에 사는 골절상 입은 할머니의 딸과 302호에 사는 암 투병 할아버지의 딸이 주고 받은 2통의 편지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102호 할머니는 302호 할아버지를 돌봐드리러 오르락내리락 하다 골절상을 입었고, 302호 할아버지는 암 투병 중에서도 102호 할머니를 위해 무릎 관절에 좋다는 가시오가피를 우리라고 딸에게 요청하는 이야기인데, 의지할 곳 없는 처지의 두 노인이 서로를 의지하면서 위하는 모습이 잔잔하게 보여지고, 그것이 딸들의 편지를 통해 드러남으로써 훨씬 깊이 있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식혜 같은 내 사랑1, 2」는 마흔 여덟이 되도록 장가 가지 못하고 고향에서 농사짓는 성구와 초등학교 동창인 이혼녀 지숙과의 우정과 사랑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소설이다. 지숙은 사람들의 눈치가 보이는 가운데에서도 씩씩하게 성구네 농사를 돕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마음을 쌓아가는 것이 1편이고, 읍민의 날 행사 장터에서 지숙이 식혜를 만들어 팔겠다고 하자 성구가 도와주는 이야기이다. 행사 당일 성구의 먼 친척인 덕만이가 성구한테 지숙이한테 이용당하지 말라고 하면서 행패를 부리자 성구가 외친다.
아, 씨발, 내가 사랑한다구! 내가 사랑해서 이러는 거라구! 근데, 뭐! 형님이 뭐! 씨발, 내가 사랑해서 식혜를 팔든 수정과를 팔든, 뭐가 문제냐구!"
여기서도 욕이 나오는데, 역시 시원하다. 묵어두었던 마음이 이 욕과 함께 발산되면서 인물들의 마음이 확인되고 소설은 끝난다.
짧은 이야기 속에 사랑의 깊이를 다 담을 수 없을 것 같지만, 길이가 길다고 사랑을 깊이 있게 다 담는 것은 또 아니기 때문에 길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압축된 상황 속에서의 감정, 독자에게 적절하게 제공되는, 혹은 적절하게 제공되지 않는 정보들 속에서 소설의 재미는 배가된다.
이기호의 재치가 다시 한번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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