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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22]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짧아서 부담없는 이야기행간의 접속/문학 2020. 12. 9. 15:49
책이름: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지은이: 이기호
펴낸곳: 마음산책
펴낸때: 2016.02.
소설집인데, 정말 짧은 소설들로만 이루어진 소설집이다. 한 편 당 4~5쪽의 분량이고, 에피소드라기보다는 라디오 사연 같은 느낌이 더 많이 드는 소설들이다. 그 중 인상적인 작품은 「내 남편의 이중생활」, 「제발 연애 좀 해」, 「제사 전야」, 「두고 봐라」, 「개굴개굴」, 「마주 잡은 두 손」 등이 있다.
「내 남편의 이중생활」은 찜질방에서 남편 험담하는 주부 같은 말투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남편은 가전제품 대리점 판매직 사원인데, 스마트폰 페이스북에 푹 빠진 것이 수상하게 여겨져 남편 페이스북을 들여다 본 이야기이다. 남편의 페이스북에서는 감상적이고, 섬세하고, 지적인 남자로 자신을 포장하고, IT 계열에서 일하고, 지구의 미래를 위해 채식을 하고, 베란다에서 혼자 외로운 밤이 어쩌고 하면서 분위기 잡고, 여자 페친들이 댓글 달면 좋아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도 페친을 신청했더니 탈퇴했다면서 다른 SNS를 또 뒤져야겠다는 얘기로 소설은 끝난다.
아주머니들의 재미있는 수다스러움이 귓가를 쨍쨍거리면서 즐거움을 주는 소설이다.
「제발 연애 좀 해」는 새벽 한 시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예전 대학교 때 단과대 학생회장 형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서술 없이 두 사람의 대화로만 이루어진 소설이다. 그 단과대 학생회장 형은 최장 수배자였는데, 그 형이 수감 후에 다시 학교로 돌아와서 투쟁하지 않은 이유는 사타구니 습진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대의를 위해서 엄청 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엄청 대단한 어려움을 겪는다고 생각하지만 남 부끄러운 현실에 접해 있다는 것이 반전을 주는 소설이다.
「제사 전야」는 할아버지 제사에 가족들이 모이지 않자 뇌에 큰 수술을 한 할머니가 제사날 죽는다고 하자 모두 모인 가족들의 이야기이다. 오랜만에 가족들이 모이니 서먹서먹해서 고스톱을 치고, 그러다가 서로 싸우다가 시골 땅 얘기 나오고, 서로 얼굴 붉히고, 그냥 서로 간다고 신발을 신는데, 내가 말한다.
"지금은 가지 마세요. 할머니가 내일 죽는다고 했어요. 그거 보고 가세요. 내일이 할아버지 제사니까, 할머니가 그때 죽는다고 했거든요. 그래야 제사도 한번에 지낼 수 있다고. 자식들 두 번 걸음 안 시킨다고."
이 얘기를 들고 갈 수 있을 자식들이 누가 있겠는가. 할머니의 이야기가 가슴 아프게 만든다. 거기다가 감정이 하나도 없이 팩트로 폭행하는 아이의 말투라서 더 아프게 느껴진다.
「두고 봐라」는 구청 공무원으로 퇴직한 아버지는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귀농이자 귀향을 했다. 평생 공무원으로 생활한 아버지가 잘 해낼지 걱정되었지만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에 그래도 의지를 갖고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문제는 모든 것을 서류로만 처리하던 아버지는 농사도 책으로 배우고 있었고, 그대로 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어느날 아버지로부터 토마토 택배가 왔고, 색깔이 너무 좋다면서 아내는 처형에게도 나눠줬는데, 이튿날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온다. 서류로만 농사를 짓다가 잘 되지 않아서 농약을 많이 쳤으니까 빡빡 씻으라는 말이었다. 아내와 처형에게는 말도 하지 못했다. 이듬해에는 옥수수가 세 박스 왔는데, 이튿날 어머니가 그거 사료용이니 먹지 말라고 하는 내용으로 소설은 끝난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 그 둘의 차이 속에서 어머니가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잘 보여주는 소설이다.
「개굴개굴」은 맞벌이 부부가 휴가를 맞추지 못해서 아버지가 아이들 세 명을 데리고 계곡에 놀러간 이야기이다. 집에서 아이들이 하도 말을 듣지 않아서 청개구리 얘기를 해주었고, 집에 계속 있으면 아랫집에 층간소음으로 항의를 또 받을 것 같아서 계곡이나 다녀오자고 해서 가게 된 것이다. 아이들은 신나게 물에서 놀고 있는데, 주변 아주머니들이 하나 둘 먹을 것들을 가져다 주는데, 의아스러워서 뚱하게 쳐다보니 아주머니가 말한다.
"그래, 애들 엄마는 언제 세상을 뜬 거요?"
"아까, 얘가 우리 쪽으로 와서 그러더라고. 엄마가 죽어서 이 쪽에 무덤을 썼다고..... 쯧쯧, 어린 것이."아이들의 엉뚱함에 웃음이 나오는 기발한 작품이다. 자식 키우는 어려움과 어처구니없음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마주 잡은 두 손」은 다시 두 개의 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1장은 책을 훔치는 여자의 이야기, 2장은 그 책의 작가의 이야기. 1장에서 가난한 여자는 대형서점에서 책을 살 수 없어서 책을 서서 보곤 했는데, 신간 코너에서 아무도 찾지 않지만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그 책을 들었고, 오랜 생각 끝에 훔치기로 마음 먹고 책을 가방에 넣고 나오다가 누군가의 손에 잡히는데서 끝난다. 2장에서는 간신히 간신히 첫 책을 낸 작가가 첫번째 독자에게 인사를 하고 싶어서 서점 한 구석에서 자신의 책을 잡는 독자를 닷새째 기다리고 있다가 자신의 책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는 여자를 발견하고 기대하고 있는데, 여자가 자신의 책을 훔치는 것을 보고, 서점 직원이 그녀를 따라가는 것을 보자 그녀를 향해 뛰어가서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 출입문을 밀치고 뛰어나가고 소설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어쩐지 자신이 원고지가 아닌 삶 속에서 소설을 쓰고 있는 기분이었다네.
그가 낸 첫 책의 제목은 '마주 잡은 두 손'이었다네.소설 같은 삶을 사는 두 남녀의 모습이 아름답다. 도덕적인 것과는 별개로.
그밖에 이 소설에는 이혼남, 취준생, 부모자식, 외국인 강사 이야기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등장해서 굉장히 풍성하게 느껴지고, 그 안에서 따뜻함과 감동, 유머와 해학이 있어서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소설들이 짧아서 부담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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