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땅 용평에 다녀왔다. 서울을 출발할 때 살짝살짝 비가 와도 용평은 눈이었다. 거기다 기록적인 폭설. 사포로가 부럽지 않은 폭설이 왔다.
시내버스를 타고 셔틀이 서는 종합운동장에 가는데 버스 번호를 착각해서 잘못 탔다. 그래서 중간에 갈아탔다. 이거 출발부터 정신차리지 않으니 이런 착오가 생긴다. 종합운동장에 도착해서 잠시 기다리니 셔틀버스들이 줄지어 들어오는데, 어둠을 밝히며 대열을 이루는 버스들의 위용이 당당하다. 버스가 멋있어 보인 적은 또 처음이다.
쉬는 날이라서 그런지, 용평은 눈이라는 소식을 접해서 그런지 사람들이 많아서 셔틀은 꽉꽉 채워서 출발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비가 눈으로 바뀌는지 보려고 잠도 자다 말다 하고 창밖을 보는데, 횡성 휴게소부터는 안개 끼더니 비가 눈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횡계시내는 폭설이 내려서 제설을 그 때서야 하고 있었다. 스키샵 앞에 눈이 너무 많이 쌓여 주차할 공간도 없는 경우도 있었다.
용평 도착 후 바라본 리조트는 말 그대로 겨울왕국이었다. 나무들에는 가지가 휘어지도록 눈이 쌓였고, 슬로프의 눈들도 모두 파우더였다. 내일 저녁에 용평 들어올텐데 이 눈들이 주말까지 버텨줬으면 싶었다.
먼저 스프링 시즌권을 발급 받았다. 처음부터 스프링 시즌권을 발급받을 생각은 아니었다. 3월에 한 번은 용평에 갔으면 좋겠다고 하니까 아내가 숙박을 알아봤다. 그랬더니 그냥 숙박 비용과 시즌권을 포함한 숙박비용이 똑같았다. 그냥 숙박을 할 경우에는 리프트권 비용을 추가로 해야 하는데, 이럴 바에는 시즌권을 끊고 숙박 서비스를 받는 것이 나았다. 우리는 시즌권을 사서 숙박을 끼워주었다고 생각하지만 용평에서는 숙박을 팔면서 시즌권을 끼워판 것 같다. 용평에서 동계 올림픽 하느라 일반인 숙박이 많이 없었으니까.....
아무튼 게렌데에서 쿠폰 할인으로 아침 먹고, 레드 리프트 타고 뒷길로 빠져서 골드 뺑뺑이를 돌았다. 상단은 모글이었고, 중단부터 내가 좋아하는 뽀드득 눈이었다. 정말 원없이 쏘고, 원없이 달렸다. 스키장의 바람이 폭풍처럼 불었지만 상관 없었다. 그냥 막 신나게 탔다.
점심 먹고나서는 골드 파라다이스의 벽도 탔다. 폭설이 내린 그 자리를 보더들이 벽 타기를 한 흔적이 있길래 나도 같이 탔고, 작은 굴곡이 있는 곳은 점프도 하면서 탔다. 라이딩만 하다가 다른 방식으로 스키를 타니까 그것도 맛이 있었다. 이 기회에 프리스키도 한 번 타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보드는 직활강하기가 쉽지 않아서 점프가 힘들지만 스키는 그래도 해보니까 전경, 후경만 잘 잡으면 점프도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골드스낵에서 휴식을 취할 때에는 해프닝도 있었다. 휴식을 취하고 다시 타려고 내 스키를 찾으니 스키가 워낙 많아서 잘 찾지 못했다. 간신히 찾아서 타려고보니 폴이 바뀌어 있었다. 형광색 카본 폴이 내 스키에 눕혀 있었다. 누가 자기 폴을 놓고서 내 폴을 가져간 것 같았다. 내 폴이 그렇게 좋은 폴도 아닌데..... 놓여 있는 폴도 흠이 많은게 꺼려졌지만 카본 폴이라서 완전 막폴은 아니었다. 그럼 그냥 바꿔 탈까 싶었는데, 똑같은 폴이 앞쪽에도 있는게 보여서 이거 동호회에서 공구한 폴 같은 느낌도 들었다. 웬지 이상해서 주변을 한 번 더 돌아보니 내 폴이 내 왼쪽 뒤쪽에 있었고, 거기에 내 스키가 있었다. 나는 내 스키와 똑같은 남의 스키를 보고 내 스키로 착각한 것이었다. 스키장에서 내 스키와 똑같은 스키를 거의 본 적이 없었는데, 용평에서 같은 스키를 이렇게 만나기도 한 것이었다. 내가 그 스키를 내 스키인 줄 알고 타고 갔으면 그 사람은 나를 절도범으로 봤을 것 같다. 그래도 한 번 더 생각하고 주변을 다시 찾아본게 정말 잘 한 것 같다.
내일 저녁에 또 올테니 장비를 적당한 데다 묶어놓고 가려고 했는데, 그래도 혹시 몰라서 갖고 올라왔다. 지난 번 오크밸리에서 장비가 갇히는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도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