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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 6] 나눔 나눔 나눔: 이 많은 문화를 어떻게 다 말할까?
    행간의 접속/문화/예술/스포츠 2010. 4. 10. 00:16

    나눔 나눔 나눔
    카테고리 정치/사회
    지은이 조병준 (그린비,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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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년대부터 거대 담론보다는 미시 담론에 관심을 가지면서 문화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면서 문화를 언어로 말하는 문화평론의 흐름이 자리를 잡게 되었고, 그런 흐름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주변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여전히 문화처럼 포괄적이면서 다양한 것도 별로 없는 것 같다. '문화'를 어디에 갖다 붙여도 다 말이 되니 문화 아닌 것이 어디에 있을까?

    차례를 보니 정말 다양한 것을 얘기한다. 상상력, 춤, 도시, 몸, 자원봉사, 음악, 건축, 공간, 대중문화 등 쉽게 연관성을 찾을 수 없는 대상들에 대해서 자기의 생각들을 담고 있다. 그 중 인상적인 부분들을 뽑아보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앞으로 더 부유하게 살기 위해 필요한' 상상력이 아니라 '지금 더 즐겁게 살기 위해 언제나 필요한' 상상력이다. 지금 우리가 상상력을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상상력은 앞으로 더 부유하게 살기 위한 수단'이라는 오해를 바로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상상력이 한창 유행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나온 얘기 중의 하나이다. 상상력이 순수하지 못하고, 불순한 것도 있으니 순수한 상상을 하자는 것이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이 그렇게 속도에 집착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물었을 때, 홍신자 선생은 아주 명쾌한 답변을 주었다.
    "침묵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지요."
    '침묵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그의 원인 진단은 날카로웠다.
    "진정한 자아를 만나기 위해서는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자기 내면의 소리는 죽음과도 같은 침묵 속에서만 비로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자기 자신을 만나기를 두려워하고 있어요. 자신의 내면이 공허하게 비어 있음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공허함을 메우기 위해서 감각의 세계를 방황합니다. 침묵하는 순간 자신의 공허함이 그대로 드러날 것이 두려워 감각에 몰두합니다. 그런 감각에의 방황이 곧 빠름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지는 것이지요. 빠름에 도취되어 있을 때는 자신을 온전히 잊을 수 있으니까요."
    속도에 대한 집착의 이유를 침묵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명확하게 대답할 수 있는 내공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홍신자 선생은 이후에 침묵에 대한 두려움은 획일성으로 이어진다고 말하고, 이에 대한 극복으로 떠남을 제안한다. 떠남은 도피가 아니라 안주하지 않는 것, 정신을 찾는 것, 홀로 있으면서 진정한 자신을 만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막강한 속도 문명의 치유로서 자연의 '느림'을 보고 따르라고 충고한다.
    "자꾸 자연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도시에서의 삶을 완전히 포기한다는 건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하지만 가끔이라도 멈추어 서서 발길을 자연으로 돌려 줘야 합니다. 숲 속을 목적지 없이 천천히 걸으며 명상해야 합니다. 걷는 것이 명상이고, 느리게 춤추는 것이 명상입니다. 그리고 그 명상의 기억을 일상의 삶에서 자꾸 기억해야 합니다."

    문화평론가 김용호와의 인터뷰도 괜찮았다. 정체성을 지키는 삶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우연에 몸을 맡기면 새로운 삶으로 진입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예측할 수 없는 우연을 따라 가다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어떻게 하려고...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기술문명의 발달로 시간과 공간이 고농도로 응축되어 삶은 획일화되고, 문명은 시간과 공간을 재테크의 연장선으로 보고, 끝없는 욕망 때문에 개인과 문명의 육체와 정신이 모두 피폐해진다. 이런 흐름을 멈추고, 한 순간의 우연을 자신을 던져야 한다고 말한다. 예측할 수 없는 우연에 자신을 맡기라는 말이 마음에 든다.

    이어서 새로운 삶을 찾는 것에 대해서도 얘기한다.
    내 삶 자체가 하나의 실험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해요. 인생을 거는 실험이죠. 그런데 그런 실험이 가능하려면, 우선 내가 물렁물렁해져야 해요. 물처럼, 바람처럼, 유연해져야 한다는 얘깁니다. 그릇의 모양이 어떻든 물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어떤 스타일의 삶을 살든 마음이 물이어야 해요. 여기서 어려움이 생겨납니다. 물처럼 유연한 마음을 유지하려면, 일단 '지금, 여기'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거죠.
    물과 같은 유연한 마음이라... 말은 쉬운데 그런 삶은 도대체 어떤 삶인 건지... 그래도 마음에 담을 만한 말인 것 같다.

    글쓴이는 인도 마더 테레사의 집에서 봉사활동도 했다. 그 때의 생각을 쓴 부분도 있다.
    마더 테레사는 결코 세탁기를 사지 않을 것이다. 전 세계에서 들어오는 기부금이 운영 자금의 전부이지만, 그 액수는 사실 그리 만만치 않다. 우선은 그 돈으로 식량과 의약품을 사야 하기도 하지만, 돈이 없어서 세탁기를 못 들이고 수도 펌프를 설치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난해지기 전에는 가난한 남을 도울 수 없기 때문이다. 캘커타에는 노동의 신성함이 살아 있다. 몽당 싸리비와 빨래 방망이에 담긴 노동의 신성함. 일이 얼마나 사람을 신나게 하는가. 더구나 보수 없이 노로지 남을 위해 하는 일이다. 그 신명으로 인해 마더 테레사의 집에서의 일은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일이 된다. 일이 꿈이 된다.
    편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도움의 마음과 노동의 신성함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봉사와 노동의 기쁨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감히 생각도 하지 못한 생각인 것 같다. 이런 생각 앞에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마이클 잭슨 내한 공연이 있었다. 그런데, 청소년을 보호한답시고 공연저지위원회가 구성되어 운동을 전개하였고, 공연 기획사는 절충하여 18세 이하는 관람을 불허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서 글쓴이는 청소년을 인격체로 대하지 않는 현실을 비판한다.
    마이클 잭슨의 공연이 정말 한국 사회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망국병이라면, 무조건 저지했어야 한다. 18세를 휴전선으로 삼고 정전 협상을 체결할 사안이 아니었다. 18세 이상은 되고, 그 밑은 안 된다니! 아무리 궁리를 해 보아도 나는 거기에서 '과보호'라는 단어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과보호는 감시와 규제로 이어지는 일종의 폭력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렇게 청소년기를 보낸 아이들이 과연 어른들과 대화를 하려 할까? 어림도 없다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세대 간의 단절은 바로 과보호의 결과라고 나는 확신한다.
    나를 인격체로 대해 주는 상대라야 나 역시 그를 인격체로 대해 줄 수 있는 법이다. 한 번도 자신들을 독립된 인격체로 대해 주지 않는 어른들을 어떻게 아이들이 독립된 인격체로 대해 줄 수 있겠는가? 어른들은 꼰대이고 노털일 뿐이다.
    핵심은 청소년들을 독립적인 인격체로 보지 않고, 보호의 대상으로만 보는 것이다. 그렇게 보호해서 청소년들이 정말로 보호되었는지도 의문이다. 학생인권조례의 제정으로 청소년의 인권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하여 앞으로는 좀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

    건축가 이일훈과의 인터뷰에서는 거대 건축물 속에서 의식을 잃어버린 인간의 모습을 얘기한다.
    "거대한 것에선 동선 단축의 논리가 통용됩니다. 화장실에 한 번 가기 위해서 30분을 걸을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가정에서 동선을 단축해야 할 필요가 과연 무엇인가요? 30평 짜리 집에서 동선이 단축된다고 대체 몇 분을 아낄 수 있습니까? 사람들이 얼마나 획일적으로 사고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예이지요. 거대한 덩어리로 머리가 꽉 차 있다는 거예요. 작은 집에선 동선을 늘려야 합니다. 시간을 늘리고 공간을 늘리며 살아야 합니다. 엿가락처럼 늘여야 해요. 왜냐? 그래야 인식의 범위가 늘어나니까요. 단축이 아니라 늘림을 목표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대안으로 우리의 옛 건축을 제시한다. 사랑채, 안채, 행랑채, 부엌 등으로 나뉘어졌던 가옥의 구조를 통해 서로 오고 감이 있고, 이런 과정에서 에너지가 생겨나고, 즐거움이 생겨날 수 있음을 말한다.

    건축가 곽재환과의 인터뷰에서는 건축의 핵심에 대해서 얘기한다.
    "시의 세계와 수의 세계가 합쳐진 것이 건축입니다. 콘크리트의 비인간성은 바로 건축이 시의 세계를 잃어 버렸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심지어 우리의 건축은 삼풍 백화점에서 보듯이 수의 세계조차 제대로 구현을 해내지 못했습니다."
    건축도 세상에 대한 반영이라면, 그 안에는 비유도 있고, 상징도 있고, 풍자도 있고 그럴 것이다. 그런 시적 영감이 필요하다는 얘기 같다.

    그리고 글의 끝에는 뒷얘기도 있다. 본문에서 다 하지 못한, 혹은 본문과 직접 관련은 없지만 생각이 나는 얘기들을 추가로 붙여서 쓴 것이다. 그 중에서도 몇 가지 생각해 볼 것들이 좀 있었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결론은 구태의연한 것 같다는 대학생의 질문에 글쓴이는 자신도 남들이 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어떤 이야기들은 구태의연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게 된다고 말한다. 사실 우리의 이야기 속의 알맹이는 수천 년 전부터 이미 반복되던 것이고, 문제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형식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글은 똑같거나 비슷한 내용을 읽는이가 재미있게, 절절하게, 생생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쓰느냐에 달렸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내용도 새로우면 더 좋을 것이고....

    글쓴이의 많은 글들이 예전 선경, 지금의 SK에서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잡지『지성과 패기』에 있었다. 내가 복학하고 문화평론에 대한 관심이 많을 때 빼놓지 않고 봤던 잡지였는데, 글쓴이의 이름을 기억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다시 만난 친구 같고, 꽤 친숙한 느낌이 든다. 글쓴이의 약간은 감정적이지만 선을 넘지 않는 절제 속에서의 비판의식이 공감이 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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