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29] 아무튼,정리: 정리하지 않는 사람의 머릿속에는...행간의 접속/에세이/인물 2025. 9. 20. 11:54
책이름: 아무튼, 정리
지은이: 주한나
펴낸곳: 위고
펴낸때: 2023.04.(전자책)
정리를 제대로 하지 않고, 무조건 늘어놓고, 무조건 미루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좀 이해를 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 표현이 재미있고, 생각과 성격이 잘 드러나면서 그럴 수도 있겠다 하는 부분들을 뽑아보았다.평소 눈앞이 잘 보이지 않는 데다 한꺼번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버릇 때문에 늘 머릿속이 어지럽다 보니 주변 환경에 심할 정도로 둔감하다. 딴생각하다가 벽에 부딪히거나 무언가를 떨어뜨리는 일도 부지기수다. 특히 피곤하면 정말 아무것도 눈에 안 걸린다. 눈에 안 걸려도 발에는 걸리는 것들 때문에 도저히 정리하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도 ‘오늘은 피곤하니까 거실은 무시하고 넘어가자’라고 결정 내리면 그 부분만 블라인드 처리할 수 있는 초능력도 가지고 있다.
생각이 많아서, 주변에 둔감한 편이라서 정리를 최대한 안 하게 된다는 것에 일부 동의한다. 나는 생각이 많고 머릿속이 복잡하면면 일단 정리부터 하면서 환경을 바꿔서 생각도 정리하는 편인데 역시 나하고 다른 것 같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생각의 과정을 꽤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런 나에게 ‘너는 이 지저분한 게 안 보이냐!’라는 질책은 늘 난감하다. 내게도 보인다. 다만 그것이 지저분하다고 자동 인지되어 곧 행동을 취해야 할 상태로 분류되고, 그에 대해 어떤 감정적인 변화까지 일어나야 ‘치워야겠다’라는 결론이 도출되는데, 그 중간중간이 끊겨버리니 문제다. 외국어가 귀에 들린다고 해서 바로 그 순간 백 퍼센트 이해하고 반응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X!”라는 외국어를 면전에서 듣고 ‘아, 이거 무슨 뜻이지? 욕인 거 같은데… 그러면 이제 화를 내야 하나?’ 이렇게 자문하다가 뒤늦게 스멀스멀 화가 치미는 것과 모국어로 쌍욕을 듣고 즉각적으로 화가 솟구치는 것은 전혀 다른 사고 과정을 거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지은이는 개발자다. 그래서 그런지 이런 과정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자주 나오고, 이런 묘사가 재미도 있다. 이렇게 자세히 자신의 머릿속 상황을 묘사해 주면 납득이 된다. 다만 중간중간에 끊겨버리는 상황은 왜 그런지, 그렇게 자주 끊어지는지 그건 좀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 다음으로 이런 생각들이 행동들과 연결되어 벌어지는 상황도 얘기하고 있다.공부하려고 교과서와 공책을 다 벌여놓고 20분 후에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더라도, 딱 이것 하나만 그리고 곧바로 공부로 돌아갈 거라고 믿는다. 그러다가 예전에 하다가 그만둔 퍼즐이 눈에 띄면 반갑다. 공부를 마무리짓지 못하는 건 싫지만 대신 퍼즐이라도 마저 하면 예전 일을 마무리하는 셈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게 퍼즐을 30분 붙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녁 시간이 된다. 그때야 내가 벌여놓은 것을 본다. 공부를 더 해야 한다. 아까 안 치워놨기 때문에 어디까지 했는지 정확하게 보인다. 안심이 된다. 퍼즐도 다시 손에 잡았으니 공부도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한두 페이지 들춰보고 아까 그리다 만 그림을 본다. 그려둔 것을 보니 흐뭇하다. 나중에 채색까지 다 끝내면 기분이 좋을 것 같다. 지금 치우면 다시 안 할 것 같다. 그러면 완성하는 걸 또 포기하는 게 된다. 어쩐지 돌려 막기 같지만 애써 무시한다. 갑자기 너무 피곤해서 세수하고 침대에 눕는다. 단어 정리장을 침대에 가지고 왔지만 어제 읽다 만 책을 보니 또 반갑다. 책을 붙들고 읽기 시작한다…
생각이 많은 사람이, 그러면서 맺고 끊는 것이 잘 안 되는 사람이 낙관적일 때 벌어지는 일 같다. 이런 사람은 언제 서두를지 궁금하다. 아무튼 이런 낙관적인 생각을 하는 근거, 그 가치관 혹은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깨끗하게 청소된 집과 정리된 책상과 해야 할 일 리스트 등으로 가득한, ‘깔끔하게 정리된 완벽한 삶’을 10이라 하면 그에 한참 못 미쳐도 괜찮다. 5분, 10분을 여기저기서 효율적으로 잘라내 완벽한 10에 가까이 가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목표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아니다. 무언가 하기 위해 떼어내는 5분은 공짜가 아니다. 내 의지력에서 깎아 가져오는 일이다. 그 5분으로 인해 나는 저녁에 조금 더 피곤할 것이고, 아이들을 향한 인내심도 조금 더 줄어들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점심을 먹고 남은 자투리 시간에 요가 매트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볼 것이다. 책상에 쌓인 서류는 나중에 때가 되면 한꺼번에 정리하겠다.
결국 시간을 쪼개서 무언가를 하는 것이 피곤하고,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좀더 쉬고, 좀더 편한 것이 자신에게 맞다는 이야기이다. 조금 더 확장하면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충분히 활용하겠다는 생각과도 연결된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과 같이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지도 궁금한데, 그 얘기도 나온다.
우리는 둘 다 ADHD이다. 쉽게 잊어버리기, 하던 일 말고 다른 일에 아주 급작스럽게 심취하기, 한번 시작한 일의 끝맺음을 아주 길게 연기하기, 어지러운 환경을 아주 쉽게 무시하기 등의 능력이 있다. 그래서 하던 일을 두고 잠깐 다른 일을 보면 그전 일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 거라는 불안감 때문에 해야 하는 일들은 모조리 눈에 보이는 곳에 늘어놓는 버릇마저 똑같다. ‘제대로’ 치우려면 어떻게든 하던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하니 다른 일을 새로 시작하기도 힘들다.
결혼 20년 차이고 둘 다 아주 쉬운 성격은 아닌데도 안 싸우고 잘 사는 이유 중 하나는 상대에게 바라는 바는 거의 없는 반면 상대에게 절대로 빚지고 싶지 않은 욕구는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나와 남편은 ‘지금 여기가 지저분한 상태인가’를 탐지하는 레이더망은 약하지만, ‘지금 내가 빚진 상태인가’는 엄청나게 잘 포착한다. 그래서 우리 집은 심하게 너저분하다가 심하게 깔끔해지기를 반복한다. 나와 남편 둘 중에 하나가 정리를 시작하면 나머지 한 사람도 그냥 있기가 불편해져서 곧바로 ‘아, 나도 뭔가 치워야겠다’ 모드로 전환된다. 한 사람이 설거지를 하면 다른 사람은 방 정리를 하고, 빨래를 시작하면 청소기를 돌린다.우와.... 남편도 똑같은 성격이라서 불편한 것이 없다. 그래도 완전히 미루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서 둘 중에 한 명이 정리를 하면 그거를 보기만 하지 않고 다른 무언가를 정리하는 모습은 이 부부가 정말 잘 맞는 부부라는 것을 보여준다.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가 궁금한데, 그런 얘기는 주제와 맞지 않아서 책에 나와 있지는 않다.
지은이의 생각과 행동에 잘 맞는 배우자가 한 명 정도는 있을 수 있지만 지은이의 생각에 동조하면서 철학적으로, 이론적으로 옹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사람도 있나 보다. 그 사람 이야기도 한다.오래전에 철학 교수 존 페리가 쓴 에세이 『미루기의 기술(The Art of Procrastination)』을 읽다가 ‘structural procrastination(구조적으로 미루기)’이라는 개념을 인상 깊게 보았다. 해야 할 일을 제쳐두고 그보다 덜 중요한 일을 처리하면서, 즉 구조적으로 미루면서, 해야 할 일들을 돌려 막기로 수습하며 살 수 있다는 주장이 너무나 와닿았다. 내 삶은 그가 말한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카드 돌려 막기 식으로 급한 일 대신에 딴짓을 하지만 그 딴짓도 어차피 언젠가는 해야 하는 일이라 그럭저럭 삶이 굴러간다. 가끔 집안일이 하기 싫을 때는 일로 도망가고, 일이 하기 싫을 땐 걸레질로 도망간다.
이 철학자도 자기가 이러니까 이런 생각과 행동을 옹호하기 위해서 이런 책을 쓴 것 같은데, 일부 납득이 가고, 동시에 나도 이런 생각, 이런 행동을 한 적이 있다. 중요하고 어려운 일과 덜 중요하고 쉬운 일이 있으면 먼저 덜 중요하고 쉬운 일을 해치우고 미루고 미루다 중요하고 어려운 일을 대충 해버리는 경우도 있다. 지금 이 블로그 글 쓰기도 중요하고 어려운 일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고 쉬운 일이라서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덜 중요하고 쉬운 일도 어차피 해야 할 일이니까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때 하면 좋지 아니한가?
그리고 마지막에 자신의 행동의 의미와 의지를 다진다.어차피 우리 모두 무(無)로 돌아가는 삶에서 고작 책상 하나 정리하는 일이란 아무 의미 없는 파닥거림으로 폄하될지 몰라도 나라는 개체가 있는 시공간에서 정리는 절대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무질서로 내달리는 세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찬 우주에서 내 작은 공간은 내가 사수한다. 그것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잊혀짐에 대항해 싸운다. 얌전히 가진 말자. 꺼져가는 빛에 분노하자. 반항하자. 엔트로피에 쓸려 가지 않기 위하여.
우주의 관점에서 본다면 자신의 공간을 정리하고 말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 공간을 자신의 뜻대로 하는 것이 이 세상에 태어나 존재하고 있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읽고나서 조금 이해하게 되었고, 정리를 잘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나도 지은이와 상당 부분 생각이 비슷한 부분들이 많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도 하기 싫고, 귀찮고, 불편하면 미루는 것이 있다. 단지 그런 행동에 대해 지은이는 죄책감을 갖지 않고, 나는 죄책감을 갖는 것이 다를 뿐이다. 지은이의 생각과 행동이 인간적이고 원초적인 모습일 것 같다. 그래도 나 같은 사람이 지은이와 같은 생각과 행동으로 살려면 용기가 필요할 것 같은데, 그럴 용기는 없다.'행간의 접속 > 에세이/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 31] 아무튼, 레코드: LP의 추억, 카세트 테이프의 추억 (0) 2025.09.22 [책 30]아무튼, 인터뷰: 인터뷰의 깊이 (0) 2025.09.20 [책 28] 아무튼, 헌책: 헌책방의 감성과 낭만을.... (0) 2025.09.14 [책 22] 초예술 토머슨: 무용지물의 미학 (4) 2025.07.22 [책 7] 아무튼, 라디오: 라디오의 감성이 묻어 있어 (0) 2025.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