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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 46] 르코르뷔지에: 현대를 열어젖힌 건축가
    행간의 접속/에세이/인물 2024. 12. 21. 23:53

    책이름: 르코르뷔지에
    곁이름: 건축을 시로 만든 예술가
    지은이: 신승철
    펴내곳: 아르테
    펴낸때 : 2020.08.

     

    르코르뷔지에의 전기문인데, 지은이가 그의 자취를 찾아다니면서 그의 이야기를 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자취라고 할 수 있는 곳들을 몇 군데 뽑아서 이야기를 한다.

    1. 라쇼드퐁 (스위스): 태어나서 성장기를 보낸 곳
    2. 아테네 (그리스): 고전 건축의 진수를 맛본 도시
    3. 푸아시(프랑승): 현대 건축의 출발 '빌라 사보아'가 있는 곳
    4. 코르소(스위스): 부모님을 위해 '작은 집'을 지은 곳
    5. 마르세유(프랑스): 현대적인 아파트 '위니테 다비타시옹'이 있는 곳
    6. 롱샹(프랑스): 후기 걸작 '롱샹성당'이 있는 곳
    7. 에뵈쉬르아브렐(프랑스): 또 하나의 걸작 '라투레트 수도원'이 있는 곳
    8. 로크뷘느카프마르탱(프랑스): 노년의 안식처가 되어준 곳

     

    르코르뷔지에는 처음에는 아버지를 따라 시계 장식가가 되려고 했고, 관련 학교에서 공부도 하고, 기술도 익혔다. 그러나 그림에 관심이 더 많았고, 학교 선생님의 권유로 우연히 건축에 발을 들여놓게 되면서 시계 장식은 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그림은 여전히 놓지 않았다.

     

    동유럽과 그리스, 이스탄불을 여행하면서 고대 건축에 흠뻑 빠져서 시적인 건축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동방 여행은 에두아르를 건축가로 거듭나게 했다. 그는 여행을 통해 비로소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되었다. 대리석이니 철근콘크리트니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언덕 위 신전은 그 앞에 펼쳐진 바다처럼 수천 년간 그 자리에 있었고, 여전히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그의 건축이 나아갈 길은 명확했다. 굳건히 서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감각적 기쁨을 영원으로 승화시키는 시적인 건축, 동방 여행은 건축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여주었고, 에두아르를 진정한 건축가로 거듭나게 했다. 언덕 위 신전에서 예술의 본질을 경험한 건축가는 이제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도시는 폐허가 되면서 집을 잃은 사람들을 위한 건축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건축은 값싸고 빠르고 효율적으로 지을 수 있어야 했다. 장식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돔이노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돔이노 주택은 산업사회에 걸맞은 재료와 구조로 이루어졌다. 벽돌을 쌓아 올린 옛 주택과 다르게 에두아르의 돔이노 구조는 간결했다. 그것은 철근콘크리트 기둥과 슬래브와 계단만으로 구성되었다. 기 기본 골조는 마치 레고블록을 쌓는 것처럼 간편하게 올릴 수 있었다. 에두아르는 구조만큼이나 간결한 건설 방식을 선호했다. 가로 6미터, 세로 9미터의 바닥 면에 4미터 간격으로 기둥 여섯 개를 세우고 그 위에 슬래브를 얹으면 건물 한 층이 완성되었다. 이 작업을 위로 반복하면 층수가, 옆으로 반복하면 면적이 늘어날 것이다.

     

    거기다가 기둥으로 하중을 받치기 때문에 내력벽이 필요하지 않아 내부 공간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는 점도 있었다. 그리고 표준화된 시스템은 대량으로 생산되어 어디에나 쉽게 지어질 수 있었다. 지금은 이런 구조가 너무 흔해서 새로울 것도 없지만 당시에는 획기적이고, 혁신적인 시도인 것 같다. 그리고 전쟁 이후의 시기라는 점도 이러한 시도를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전쟁이 없었으면 대량으로 주택을 지을 일도 없었을테니까말이다.

     

    파리에서 건축도 하지만 더 원하는 것은 그림이었다. 그래서 동료 화가와 그림을 그리면서 <에스프리 누보>라는 진보적 엘리트 잡지를 창간하고 발행했다. 

    1920년 10월에 창간한 <에스프리 누보>는 진보적인 엘리트 잡지를 표방했다. 르코르뷔지에와 오장팡은 기계가 새로운 정신을 일으키고 있다는 급진적인 주장을 펼쳤고, 이는 점차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다. '르코르뷔지에'는 당시 이들이 사용한 필명 중 하나였다.


    우리가 그를 부르는 이름이 여기에서 나왔다. 처음에 이 사람 이름을 보고서 이름 참 특이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런 사연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유명해졌고, 건축적으로도 명성을 쌓게 되었다.

    파리 정착 후 불과 몇 년 사이에 르코르뷔지에의 인생과 건축은 극적인 변화를 겪었다. 시골 출신의 건축가 에두아르는 르코르뷔지에라는 유명인이 되었고, 그의 건축양식 역시 완전한 변화를 겪었다. 그는 지역적 특징을 살려 건물을 짓는 데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르코르뷔지에는 구두 상자 모양의 주택을 속속 선보였다. 그의 구두 상자들은 규격화, 표준화되어 대량생산이 가능했고, 설계도만 있다면 전 세계 어디서나 지어질 수 있었다. 그는 어느 곳의 어느 누구라도 편리하게 생활할 수 있는 주택의 모습을 고안해냈다. 직육면체 같은 기하학 형태의 건축은 시대를 초월하여 전 세계 어디에서나 통용될 만한 것이었다. 보편적인 디자인을 추구하고 열정적인 저술 활동을 통해 새로운 정신을 설파하면서 어느덧 그는 모더니즘 건축의 대표 주자가 되었다.

     

    이렇게 모더이즘 건축의 대표 주자가 된 후로는 그림보다는 건축에 힘을 쏟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림을 놓지는 않았다. 당시의 일상을 이렇게 묘사할 수 있다.

    비록 전업 작가의 꿈을 포기해야 했지만 건축을 통해 그림에 대한 욕망을 대리 충족했다. 그는 건축을 회화의 연장으로 이해했다. 매일 오전에 그림을 그렸고, 오후에는 세브르가 35번지에 나가 건축물을 그렸다. 그림 덕분에 그의 규칙적인 일상은 그가 꿈꾼 보헤미안의 삶과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 그는 오후 5시 반이 되면 '건축은 너무 어려운 것 같다'며 슬그머니 퇴근해 버렸다. 아내와 저녁식사를 하고, 밤에 글을 쓰기 위해서였다. 남은 작업은 직원들 몫이었다. 사촌이자 동업자인 잔느레가 사무소 경영과 살림을 맡아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잔느레 덕분에 그는 글과 그림을 이어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의 대표작 빌라 사보아가 등장한다. 사업가인 사보아가 별장을 의뢰하여 지은 것이다.

    집 안은 구조에 대한 걱적 없이 자유롭게 구획되었고, 건물 내부와 외부가 뒤섞여 제대로 된 별장 분위기를 냈다. 가로로 길게 낸 수평창 덕분에 파리에서는 경험하지 못할 전원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사보아 가족은 마치 크루즈에 몸을 실은 관광객처럼 대기를 떠다니는 듯한 주택에서 풍경을 즐겼다. 건축가는 살기 위한 기계를 만들면서 건축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감정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사려 깊은 건축가 덕분에 사보아 가족은 주말 별장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사보아 가족은 건축이 주는 행복을 제대로 경험했다. 장대비가 쏟아지기 전까지.

     

    비가 문제가 될 줄은 몰랐다. 언덕에 지어져서 침수가 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방수였다. 르코르뷔지에는 옥상정원을 만들기 위해 지붕을 평평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보통 춥고 음습한 다락방에서 지내던 가정부는 1층 공간을 차지할 수 있었지만, 평평한 지붕은 빗물을 제대로 흘려보내지 못했다. 게다가 수평창은 눈썹 없는 모나리자 같았다. 배수 장치에도 불구하고 창문은 그대로 빗줄기에 노출되었다. 방수 기술이나 재료, 시공법이 모두 충분하지 않던 시절, 빌라 사보아는 물난리를 제대로 겪었다. 건물 내부로 빗물이 스며들었고, 급기야 바닥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사보아 가족은 대책을 요구했지만 르코르뷔지에는 무책임하고 엉뚱한 대응으로 화를 돋구었다. 그래서 소송을 준비했지만 2차 대전으로 건물은 폐가가 되었다. 푸아시 당국은 이 집을 허물려고 했지만 문화계 인사들이 보존을 주장하여 지금까지 남아있다. 건축가가 힘든 점이 하자 보수에 대한 것이다. 완벽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것들은 해야 하는데, 힘들다고 이렇게 회피하면 나라도 화날 것 같다. 집을 짓는 것이 한 두 푼이 드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아무튼 그의 명성은 여전히 높았고, 그는 자신의 건축에 대한 생각을 '건축의 시학'이라는 말로 정리했고, 그의 건축은 유럽을 넘어 미국과 남미까지 퍼지게 되었다.

    르코르뷔지에는 관습에서 해방된 건축을 강조했다. 빠르게 달리기 위한 자동차와 먼 거리를 효율적으로 이동하는 비행기처럼 주택 역시 인간의 삶에 최적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인간을 기능과 효율의 톱니바퀴 속으로 밀어 넣으려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기능주의자가 아니었다. 그가 자동차, 비행기, 증기선에서 본 것은 새로운 시대정신이지, 집이 진짜 기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건축가이기 이전에 매일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고, 아름다움을 대단히 중시했다. 그의 주택은 편리한 기계이면서 예술이 되어야 했고, 무엇보다 시적인 감상을 불러일으켜야 했다. 그는 이를 '건축의 시학'이라 불렀다. 집을 살기 위한 기계라고 주장하며서 동시에 건축의 시학을 강조하는 그의 독특한 사상은 고층 빌딩으로 뒤덮인 뉴욕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은 산업화의 결실을 맺은 듯 보였지만, 대공황 이후 물질 너머의 세계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의 사상과 예술은 뉴욕을 통해 신대륙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러면서 하나의 건물만을 짓는 건축에서 도시 전체를 계획하는 일도 하게 된다.

    르코르뷔지에는 세계 곳곳을 다니며 일생 마흔두 개 도시의 계획안을 수립해꼬, 거의 모두 거절당했다. 이는 시븍한 도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사명감의 발로였지만, 자신이 전 세계 모든 도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과도한 자신감이 엿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는 남미 각국에서도 주거와 교통 문제를 일시에 해결할 수 있는 도시계획안을 관철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여러 도시들의 도시 계획을 생각하면서  특히 집중한 곳은 지중해였다. 

    르코르뷔지에는 건축이 혁명을 대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건축은 우리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그것이 제대로 기능한다면 삶은 훨씬 나아질 것이고, 모든 것을 갈아엎는 혁명은 더 이상 필요없을 것이다. 르코르뷔지에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그의 야심은 실로 대단했다. 그는 파리, 바르셀로나, 알제, 로마를 프로젝트의 거점으로 삼았다. 이 도시들은 지중해를 다이아몬드 형태로 감싸고 있다. 르코르뷔지에는 배를 타기 위해 마르세유를 드나들면서 이 일대의 중요성과 가능성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유럽인에게 지중해는 세계로 나가는 관문이었다. 당연히 바다를 차지하려는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그는 미개척지지를 찾아 헤매는 탐험가도, 그곳을 식민화하려는 제국주의자도 아니었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다. 그리하여 현대적인 도시의 모습을 제안하고, 그러한 삶을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의 건축은 지중해 인근 도시에 세워져야 했고, 바닷길을 따라 세계 각처로 퍼져나가야 했다. 건축에서 모더니즘은 그렇게 형성되었다.

     

    그러다 2차 대전이 일어나고 프랑스는 독일의 침공으로 비시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드골은 영국으로 가서 저항했지만 르코르뷔지에는 프랑스에 남아서 자신의 건축을 이어갔다.

    내가 할 일은 여기에 있다. 나는 패배하더라도 프랑스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아니, 떠날 수 없다. 나는 세상을 바로잡아야 하는 이곳에서 싸워야 한다.

    르코르뷔지에는 생텍쥐페리 같은 예술가나 동업자인 잔느레와 다른 길을 선택했다. 생택쥐페리는 알제리에서, 잔느레는 그르노블에서 레지스탕스에 가담했다. 그러나 르코르뷔지에는 독일이 아니라 타락한 세상과 싸워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동업자와 완전히 갈라서면서도 레지스탕스의 총을 든 투쟁에 동의하지 않았다. 페탱의 새로운 유럽 건설에 기대를 걸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대단히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비시정부는 독일의 승인 아래 식민지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하고 있었고, 르코르뷔지에는 벌써 10년 가까이 알제 도시계획에 매달리고 있었다. 알제는 그의 지중해 계획의 첫 단추나 마찬가지였다. 

     

    현대의 시각으로는 자신의 건축을 이루기 위해서 괴뢰정권인 비시정부의 밑에서 일을 하려는 선택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당사자는 많은 고민을 했겠지만말이다.

     

    2차 대전이 끝나고 1차 대전과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었고, 이들을 위한 건축이 또 필요하게 되었다. 그렇게 등장한 것이 마르세유에 있는 유니테 다비타시옹이다.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따뜻한 햇살을 받고 서 있다. 르코르뷔지에는 햇살 아래 놓인 기하학 형태를 좋아했다. 마르세유의 아파트 역시 그가 동방 여행에서 본 신전들처럼 명쾌한 형태로 지어졌다. 하지만 건물물은 꽤 복잡한 유닛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독신 가정부부터 대가족에 이르는 각양각색의 주거 형태를 고려해 스물세 개의 유닛을 준비했고, 이를 직육면체 형태의 건물에 채워넣었다. 건물 정체가 기둥과 보로 지탱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대의 주상복합에 해당하는 개념을 생각해내고 실제로 구현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현대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후에 롱샹성당이나 라투레트 수도원 같은 종교 건축도 짓게 되면서 그의 명성을 이어간다. 그리고 지중해의 작은 집에서 아내와 함께 살다 아내를 보내고 자신도 지중해에서 수영을 하다 생을 마감한다.

     

    이름으로만 명성으로만 알고 있던 르코르뷔지에라는 건축가를 이 책을 읽고나서 조금 더 알게 되었다. 르코르뷔지에가 처음부터 건축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전업작가를 원했다는 것, 그래서 건축을 꾸준히 한 것도 아니라는 것, 그림 외에도 글도 많이 쓰면서 책도 많이 냈다는 것 등이 새롭게 알게 된 것이다.

     

    건축에 대한 책은 많은데, 건축가에 대한 책이 많지 않은 것 같다. 건축가에 대한 책을 더 찾아서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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