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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 40] 브로콜리 펀치: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는 없고 정도의 차이만이 있을 뿐.
    행간의 접속/문학 2024. 9. 27. 09:49

    책이름: 브로콜리 펀치

    지은이: 이유리

    펴낸곳: 문학과지성사

    펴낸때: 2021.10.

     

    비현실적인 SF? 환타지? 아무튼 비현실적인 내용을 담은 소설집인데, 거시적이지 않다. 웅장하지 않다. 그냥 일상에서 비현실적인 일이 벌어지지만 인물들은 놀라지 않고 담담하다. 처음에는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를 생각하지만 일단 그 일들을 받아들이고,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리고 다시 변화된 일상을 담담하게 살아간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 뿐이니까.....

     

    「브로콜리 펀치」는 복싱 선수의 주먹이 점점 브로콜리로 변한다는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생각이 많아서 그런 것이라고 수군댄다. 원준은 복싱 선수로서 링 위에서는 상대를 죽일 듯이 주먹질을 하지만, 자신이 왜 그런 일을 해야 하는지 갈등을 하고 있었다. 그런 갈등의 결과 주먹이 브로콜리로 변한 것이다. 결국 복싱을 그만 두고 마음을 다시 잡자 브로콜리는 꽃을 피운다. 삶의 고민과 결심의 과정을 상징적으로 잘 드러낸 작품이다. 

     

    「왜가리 클럽」은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없다. 이 소설집에서 가장 현실적인 이야기이다. 신림동 대학가 원룸촌에서 반찬가게를 하던 양양미는 장사가 잘 되지 않아 접는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어느 날 도림천을 걷다가 왜가리를 관찰하는 여자를 만나고 여자의 제안으로 왜가리를 관찰하는 클럽에 가입하게 된다. 왜가리를 함께 관찰하면서 왜가리에서 삶의 태도를 배우게 되는게 그 내용이 인상적이다.

     "우리 중학생 막내가, 유별나게 속을 썩이는 앤데요. 왜가리를 보니까 참 쟤는 쟤네 부모가 어떻게 가르쳤길래 저렇게 고기를 똑부러지게 잘 잡나 싶은 거예요. 첨에는 그렇게 부러워하면서 내내 봤는데 보니 알겠더라고요. 가르쳐서 되는 게 있고 스스로 배워야 하는 게 있다는 걸."
    "일찍 결혼한 걸 후회한 적이 많았아요. 헤어질 타이밍이 여러 번 있었는데 놓쳐버리고 어영부영 결혼하게 된 거지. 근데 왜가리를 보면 그래요. 되게 타이밍을 잘 잡잖아? 여기서 좀 재미 봤다 싶으면 귀신같이 알고 다른 데로 날아가고 여기는 이제 글렀다. 쟤들이 이 타이밍을 어떻게 잡는지가 난 너무 궁금했거든요. 근데 지금은 좀 알 것 같아요. 몇 번 실패하면 거기는 뜬 거예요. 그럼 그걸 알았으면 날아가버리면 되거든. 거길 뜨면 되는거야. 그게 참 뭐랄까, 인간보다 나은 것 같아요."

     

    클럽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자 양양미도 왜가리를 보고 생각한 것이 있다.

    실은 나도 있었다. 왜가리를 보고 생각했던 것이. 왜가리는 그 생김새도 미끈하니 좋고 물고기를 잡는 모습도 노련하여 멋있었으나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장면은 사냥에 실패했을 때였다. 오랫동안 도사리고 집중해 부리를 내리꽂았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물방울만 사방에 튀기며 고개를 드는 왜가리가 분명 나였다면, 아니 사람이었다면 민망하여 헛기침이라도 한번 하며 혹시 누가 이 창피한 꼴을 보지는 않았나 슬쩍 주변을 두리번거렸을 법한 보기 좋은 실패였다. 하지만 왜가리는 그러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실패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성공과 실패를 같은 무게로 여기는 것에 가까웠다고나 할까. 그도 그럴 것이 고기를 잡았다고해서 왜가리가 특별히 기뻐하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왜가리에게는 그저 매번 잘 노려서 잘 내리꽂는 것만이 중요했고 그 뒤의 일은 성공하든 실패하든 모두 같았다. 그것이 멋있었다고, 가슴이 뻐근하도록 부러웠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렇게 왜가리로부터 삶의 자세를 배우고 자신의 집에 쌓아두었던 남은 반찬들을 클럽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다시 삶의 의지를 보여준다. 삶의 의지를 아주 비장하게 결심했으면 너무 작위적일 것 같았지만 일상 속에서의 소소한 변화를 통해 삶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음을 보여주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치즈 달과 비스코티」는 정신 상담을 받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돌과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상담을 받는다. 상담에서 만난 쿠커와 어찌 하다 보니 주말에 계곡에 가게 되었다. 자신은 이야기할 수 있는 돌을 구하러 간 것이고, 쿠커는 낚시를 하러 간 것이다. 자신에게 진득하게 접근하는 쿠커가 귀찮았지만 약속을 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계곡에서 낚시를 하던 쿠커가 물에 빠지자 나는 물에 뛰어들어 쿠커를 구해낸다. 그러나 주머니 속의 말하는 돌인 스콧을 잃어버린다. 이 때 쿠커가 진심으로 미안해 하면서 돌과 말하는 것을 다 이해한다고 한다. 아무도 자신을 믿어주지 않았지만 쿠커만이 믿어준 것이다. 잠수부를 동원해서 스콧을 찾았고, 둘은 돌아온다. 돌아오는 길에 쿠커는 자신이 날아서 달까지 갈 수 있다고 말하면서 달은 <월레스와 그로밋>처럼 치즈로 되어 있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나는 믿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날 저녁 피자를 먹고 환기하려고 창문을 열고 밖을 보는데 쿠커가 달을 향해 날아가는 것을 본다. 그 광경을 스콧에게 말하지만 스콧은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소설은 끝난다. 자신보다 더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쿠커의 말이 진실이 되는 순간 돌과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자신은 거짓의 세계로 전락한다.

     

    나는 이 결말에서 이런 질문을 했다. 작가가 왜 결말에서 돌이 말을 안 하게 했을까? 내가 찾은 대답은 '돌은 원래 말을 안 하잖아.' 돌이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주인공 나에게 몰입했을 때 할 수 있는 생각인데, 우리는 거기에 너무 몰입했던 것인데, 이렇게 정상과 비정상을 혼동하는 과정에서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지 다시 생각하게 만들기 위해서 작가가 이렇게 결말을 지은 것 같다.

     

    이 작품 속에서 비현실이라고 하는 것들이 정말 비현실인지도 애매하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비현실인지 우리는 모른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그래서 이 소설집 속 인물들이 그렇게 담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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