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하나의 문화 17호는 가족 제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기억할 만한 부분을 발췌해 보았다.
자녀들을 떠나보낸 뒤 자신의 가치관과 취향과 감성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은 부분관계 질을 높여주는 조건이다. 20년 후에 헤어질지 말지 생각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결혼은 어떨까?
자식들 다 키워놓고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는데, 완전히 새로운 인생의 가능성도 열어놓는다는 얘기이다. 지금 들으면 쿨하다 못해 참 파격적인 이야기이다.
불필요한 간섭은 하지 않지만 서로 걱정끼치지 않아야 한다.
가족 모두 관계되는 집안 일이나 인생의 중대한 결정은 의논한다.
합리성과 친밀성은 이분적인 것이 아니라 다양한 정도가 존재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까지 서로 돌보고 친밀하게 지내야 행복한가는 사람마다 다르다.
행복을 느끼는 친밀성의 정도를 어떻게 측정할 수 있겠는가? 결국은 살아봐야 알 수 있는 것이고, 그리고 그 정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사랑은 절실해야 하고 절실해야 행복한데, 절실한 그 순간부터 사랑이 안되는거야. 80%의 좋아하는 감정을 갖고 있으면 잘되는데 100%가 되면 안돼.
영원히 내 삶을 함께 할 임자는 없지만 어느 일정한 시기를 동반자로 살 수는 있을 것 같아.
소홀히 하고 바쁘더라도 에너지 보내줄 수 있는 관계, 노력하지 않아도 좋아할 수 있고, 서로 배려, 유머 코드, 토론되는관계, 서로의 성장을 지켜봐 줄 수 있는 관계, 연애를 느끼는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지내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서 서로 힘을 주는 관계
일상 생활을 하면서 불편하지 않고,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고, 그러면서 친밀성을 어느 정도 유지하는 관계
서로를 성장시켜 줄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 연애에만 죽도록 매달리지 않는 사람, 내가 없어도 잘 살 수 있는 사람
극도의 정서적 엮임은 없되, 충분한 정서적 교감이 있어야 함.
정서적 지지자, 동반자와 반드시 함께 살아야 하나? 가까운데 살면서 연락하면 안되나?
한마디로 말이 통하고, 필이 통하는 사람인데, 이런 사람 만나는 것은 운명이 아닐까? 이런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알아 볼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이런 사람을 원한다고 하면 상대방은 도대체 어떻게 말할까? 있기는 한 걸까?
너무 쿨하다.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겠고, 이런 생각을 표현하는 사람도 못 봤다. 없는 것은 아닐텐데, 실제로 만난다면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쉬울 것 같지는 않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부터가 이상인지 구별도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