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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33] 번역가 K가 사는 법: 중국어 번역가의 현실행간의 접속/에세이/인물 2023. 7. 25. 00:28
책이름: 번역가 K가 사는 법
곁이름: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지은이: 김택규
펴낸곳: 더라인북스
펴낸때: 2020.09.
중국 출판 번역가의 일과 생각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번역가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에서 많이 벗어난 이야기가 많아서 나름 흥미를 갖고 읽을 수 있었다. 읽으면서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을 뽑아보았다.
1. 번역글이 아니라 나의 글
지은이는 중국어를 한국어로 번역한다는 생각보다는 자신의 글을 쓴다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번역가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작가를 꿈꾸어 왔기 때문에 그런 측면이 강한 것 같다.
나는 번역할 때 "번역을 하고 있다"는 느낌보다는 "글을 쓰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중국어를 한국어로 변환하고 있는 것을 의식하기보다는 중국어가 내 머릿속에 각인해놓은 심상을 내 글로 자유롭게 풀어내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번역한 텍스트는 원작자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다. 원작자의 숨결이 깃들어 있긴 하겠지만 그것은 내 의도가 아니라 원작자의 숨은 영향력일 뿐이며 나는 번역 과정 내내 그것을 눈치보지 않는다. 나만, 내 글만 중요하며 원작자와 원문은 그저 원천으로서 알아서 내게, 내 글에 영향을 끼쳐야 한다. 나는 비록 번역가이지만 온전히 내 모국어로 호흡하고 내 모국어 안에서 자유롭다.
원작자에게 종속되지 않는 자신만의 글이라는 생각으로 번역을 한다는 생각이 새로웠다. 그럼 원작자의 색깔과 의미들은 어떻게 되는 건지에 대해서 궁금하기도 하다.
2. 번역가의 자질
지은이가 번역한 책에 대한 서평에 '번역가로서의 자질이 의심스럽다'고 혹평을 한 독자의 미니홈피를 추적하여 그와 연락한 이야기도 있다. 지금이야 개인정보 보호에 대한 인식이 높아서 그런 추적이 쉽지 않지만 10년도 더 전에는 그게 가능하기는 했다. 아무튼 그와의 통화에서 자신이 그 책의 번역자라는 것을 알려주고, 번역에도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공동 번역 작업을 제안해서 함께 작업을 한다. 그리고 그가 번역이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 작업인지를 몸으로 느끼게 해준다. 결국 그 독자는 번역의 꿈을 버리고 편집자로서 새로운 꿈을 꿔서 지금은 베테랑 편집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출판행사에서 그를 다시 만나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는 얘기도 한다.
지은이 자신도 그 때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의아스럽다고 하긴 했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정말 충격적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내 블로그에 책에 대해서 개인적인 생각들을 쓰는데 작가가 내 글을 읽고, 내 SNS를 추적해서 연락을 한다고 생각하면 좀 무서울 것 같다. 아무튼 뒤에 다시 만났을 때에는 웃으면서 악수할 수 있었다고 하니 다행이지만....
3. 중국 문학 세미나
지은이는 자신이 중국 문학을 번역하기는 하지만 주로 40년대 이전의 작품들만 대충 아는 정도이지 그 이후의 작품들에 대해서는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중문과 석박사 과정 학생들을 모아서 중국 문학 세미나를 개최해서 작품 읽고 발표하고 토론하는 모임을 만들어서 진행했다고 한다. 혼자서 하려고 하면 그 많은 작품을 할 수가 없을텐데 여럿이서 함께 하니 나름의 성과를 얻을 수가 있었다고 한다. 석박사 과정 학생들은 논문이나 연구의 주제를 찾을 수도 있고....
지은이는 자신에게 해결해야 할 과제나 넘어야 할 장벽이 생기면 피하지 않고 덤벼서 결국은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 같다. 중국 출판사와의 합작 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도 그런 역량이 보였는데, 본인 스스로은 무능하고 쓸모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4. 왜 하필 중국의 책인가?
지은이도 처음부터 중국에 대한 호감을 갖고 중국 번역가가 된 것은 아니었다. 문학을 하고 싶었는데 부모님의 반대로 할 수 없이 중국어를 전공하게 되었고, 대학 가서도 문화 백수로서 읽고 싶은 책만 읽고, 글을 쓰다보니 졸업하게 되었지만 갈 데가 없어서 대학원에 가게 되었고, 결혼을 하고 애가 생기다보니 생계를 위해서 중국어 번역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작업을 하면서 중국 콘텐츠가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도 있음을 확인하고 이를 보급하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관련 분야에 종사하는 중국어 전공자들에게 역할을 부여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고.....
5. 전업 번역가에 대해서
지은이는 한마디로 다른 것을 할 수 있으면 하라고 말한다. 다른 것은 도저히 할 수 없고, 이 번역일만 하고 싶다고 하는 사람만, 열악한 조건을 간수할 사람만 전업 번역가로 하라고 말한다. 먼저 수입의 측면에서 봤을 때 매당 번역료를 3,500원으로 하고, 한 권당 1,000매라고 한다면 한 권을 번역하는 데에 3,500,000원을 벌 수 있는데, 1년에 번역할 수 있는 권수가 5권 정도인데, 그렇다면 1년에 1,750만원 정도이다. 평균이 그렇다는 것이다. 더 낮을 수도 있고, 높을 수도 있지만 높은 경우라면 몸이 축날 가능성이 크다. 거기다가 AI다 뭐다 하면서 웬만한 것들은 기계로 번역하는 시대가 올 것이고, 번역가는 기계가 번역한 것을 다듬는 정도로 역할이 축소될 수도 있다. 거기다가 중국어 도서는 출판 시장에서 대세가 아니라서 일자리를 스스로 기획해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여러 모로 쉽지 않다. 현실적인 얘기를 하는 것이다.
6. 도서 기획에 대해서
지은이는 그래서 출판사에서 번역을 의뢰하기 전에 자신이 번역하고 싶은 작품을 발굴하여 번역하는 일도 한다고 한다. 출판사에 기획서를 제출할 때에는 특히 저자, 내용, 현지 반응, 기획 포인트 등을 상황에 맞게 준비하여야 하는데 작가의 비중이 적을 때에는 내용에 비중을 두고, 작가가 인지도가 있으면 작가에게 포인트를 맞추는 등 나름의 팁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렇게 번역가가 발굴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일거리를 만드는 것도 있지만 하기 싫은 작품의 번역을 피하고, 하고 싶은 작품을 번역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나는 번역가는 가만히 있으면 알음알음으로 번역일이 떨어지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고 한다. 더군다나 중국어 같은 경우는 특히 그러하다.
7. 역주에 대해서
번역자가 독자들에게 친절하게 알려주기 위해서 역주를 다는 경우도 있다. 나는 친절하게 알려주는구나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고 한다. 먼저 대상 독자의 수준을 감안해서 달아야 하고, 너무 친절해서 너무 많은 양의 역주가 달리면 독자들이 질릴 수도 있으니까 조절해야 한다. 특정 정보를 모르면 이해할 수 없는 경우에만 역주를 달아야 한다. 또한 번역자가 독자보다 월등하게 높은 수준의 이해도를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신 없으면 하지 말라는 얘기 같기도 하다.
읽고나서 보니까 지은이는 이 책을 내기 전에 《번역가 되는 법》이라는 책을 내면서 미래가 암울해도 '고분고분 죽을 마음이 없다'고 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다음 책인 이 책의 부제가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라고 되어 있는 것 같다. 처음에는 밑도 끝도 없이 왜 이런 말을 했나 싶었는데 나름 이유가 있었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전작도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거기에는 중국어 번역가의 입장보다는 좀 더 보편적인 번역가의 면모가 나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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