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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 17] 예술과 중력가속도: 무거움과 가벼움의 화학적 결합
    행간의 접속/문학 2023. 5. 18. 11:32

    책이름: 예술과 중력가속도

    지은이: 배명훈

    펴낸곳: 북하우스

    펴낸때: 2016.11.

     

    배명훈의 단편소설집이다. SF 소설이라고 했을 때 가상의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 소설집에서는 그렇지 않은 서정적인 작품들도 있어서 신선했다. 그리고 배명훈의 초기작들도 들어 있어서 작가의 예전 성향도 알 수 있었다. 인상적인 작품들이 몇 개 있어서 뽑아보았다.

     

    「예언자의 겨울」은 핵무기를 발사한 상태에서 바다 밑 핵잠수함의 상황과 바다의 고래들의 상황을 상호 교차한다. 핵잠수함에서는 핵전쟁으로 돌아갈 기지가 없는 상황에서 함장이 자살하고 승조원원들은 난감해 한다. 한편 고래들은 핵전쟁으로 먹이가 없어지게 되자 먹이를 찾으러 이동하는 도중에 혹등고래와 푸른 고래들이 협력하여 범고래와 맞서 싸우고, 그 가운데에서 지키려고 했던 예언자 고래가 죽고, 새로운 예언자 고래를 찾게 되는데 핵잠수함을 예언자 고래로 여기고 따라다니게 된다. 핵전쟁이 일어나면 있을 수 있는 상황들을 신선하게 그리고 있다. 그리고 약간의 어처구니 없음도 있는데 그게 가볍지가 않다.

     

    표제작인 「예술과 중력가속도」는 달에서 태어나 달에서 무용을 하던 은경에 대한 이야기이다. 은경은 어떤 사정으로 달에 계속 있지 못하고 지구로 왔지만 중력이 너무 세서 점프도 많이 못하고, 예술적인 표현도 한계를 느낀다. 애인인 나는 은경을 응원하면서 사랑을 키우고, 은경의 공연에 초대받는다. 공연은 외계예술가 협회 설립 축하 공연인데, 제1부는 화성, 제2부는 지구,  제3부는 달예술가협회의 공연이었는데 은경은 제3부를 맡았다. 공연장은 놀랍게도 비행기였는데, 비행기 안은 매우 넓어서 천장 높이가 7m나 되었다. 비행기가 이륙을 하고 중력을 각 부마다 화성, 지구, 달에 맞추기 위해 기체를 거의  수직에 가까이 올리다가 갑자기 추락시키는 운행을 하게 되고, 각 행성의 예술가들은 중력이 그 행성에 맞을 때 무용을 하는 것이다. 대신 관객들은 기체의 움직임에 적응하지 못하고, 어지러워 하다가 멀미하고, 소리 지르고, 욕 하고, 눈물 흘리고 난장판이 된다. 나도 은경의 공연을 보기 위해 참으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토하고, 괴로워하고, 눈물 흘리고, 빨리 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공연이고 뭐고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순간적으로 은경의 무용을 보게 된다.

     

    그것은 사람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거의 천체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행성이나 항성처럼 중요한 천체가 아니라, 유성이나 운석처럼 보잘것없는 천체. 무용수라는 이름의 초라한 셀레스철 바디(celestial body).
    가늘게 뜬 눈에 이런 것들이 아른거렸다. 지구라는 공간에 의해 정의되는 물체들의 움직임을 훌쩍 벗어나, 천상의 규칙에 따라 스스로의 운행규칙을 다시 정의하는 데까지 이른 초월적인 물체. 혹은 지구라는 구체적 공간을 살짝 벗어나 보편적 공간이 '우주' 어딘가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아무것도 아닌 존재. 무게로는 잴 수 없고 관성으로만 잴 수 있게 된 질량. '여자 무용수'라는 역할. 천체가 된 인체. 그리고 여체. 정신없이 무대 위를 떠도는 존재의 파편들.

     

    온몸으로 예술을 하는 은경과 온몸으로 토하면서 그의 예술혼을 이해하게 된 나의 모습이 아름답지 않고, 더럽게, 그래서 웃기게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은경은 그와 같은 공연을 하지 못하게 되자 자살한다. 나는 그녀를 추모한다. 결말은 무거운 이야기인데, 중력 얘기를 많이 해서 그런지 무게감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독특한 분위기의 작품이다.

     

    「예비군 로봇」은 사랑의 실패로 직장을 때려친 은경이 특수중장비 면허를 갖고 화성에 가서 예비군이 된 이야기이다. 은경은 어렵게 중장비를 임대해서 화성에 가서 일을 했다. 그런데 총무팀에서 예비군 훈련을 하라는 통보를 받는다. 은경의 장비가 훈련소집 대상이기 때문에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훈련을 하는데 은경에게는 간식을 안 준다. 은경은 훈련 대상이 아니라서.... 은경이 항의하자 은경을 현지 충원 장교로 임명해서 간식을 먹는다. 그러다가 화성에 있는 기계지성이 전쟁을 일으켜서 정규군이 맞서 싸웠지만 적의 타격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고, 기계지성이 민간인 거주 구역을 공격하려고 하자 예비군이 동원된다. 그리고 은경에게 민간인 거주 구역을 지키라는 명령도 하달된다. 은경이 예비군 장교로 돼 있었기 때문이다. 기계지성은 물류 데이터베이스를 공격했고, 다시 돌아갔다. 보급물품의 피해는 없었지만 데이터베이스가 없어서 그 많은 물류를 정리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은경은 물류 데이터베이스 업무를 했었기 때문에 RFID를 찍어서 방어를 했다. 즉, 실제로 존재하는 물품은 아니지만 RFID 코드를 제작해서 비치하면 기계들은 물품이 있는 것으로 인식해서 공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기계지성은 혼란스러웠다. 상황 판단을 위해 생각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해독할 수 없는 코드는 바로 "나"라는 코드였다. 자아인식이 없던 기계지성은 도저히 알 수 없는 코드였다. 결국 기계지성은 실존적인 질문에 답하지 못하느라 공격을 하지 못했고, 나토군의 반격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리고 200년이 흐른 후에 기계지성은 '나'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기계지성의 '나'는 인간이 말한 '나'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녔고, 인간들은 결코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읽으면서 어처구니 없는 상황 속에 은경이 빠지고, 그 상황이 전개되는 방향도 어처구니 없어서 재미있었다. 그리고 인간은 생각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반응하는데 기계가 생각하고 고뇌하는 역설적인 상황도 재미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기계가 자아를 인식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했다는 측면에서 신선했다.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작품들이 가벼운 듯 하면서도, 무게감이 있고, 무거운 듯 하면서도 가벼워서 좋았다. 무거움과 가벼움이 적절히 자신의 공간 속에 자리 잡고 있다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나오기도 해서 멈칫하기도 하지만 그런 멈칫거림을 유발하는 전개가 재미를 주고 있다. 제목에 중력가속도라는 말이 있어서 그런지 유난히 무게감의 변화가 잘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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