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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 10] 인간이 그리는 무늬: 인문적 통찰의 힘
    행간의 접속/인문 2020. 8. 2. 16:33

    책이름: 인간이 그리는 무늬

    곁이름: 욕망하는 인문적 통찰의 힘

    지은이: 최진석

    펴낸곳: 소나무

    펴낸때: 2013.05

     

    인문학이라고 하면 인간에 대한 학문. 그 중에서도 문학, 역사, 철학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 이상의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거나 알려주는 책이나 강연 등을 만나지는 못했다. 그저 인문학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중요하다는 것 정도로만 이야기는 흘러갔고, 핵심을 꿰뚫는 이야기는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책은 문학, 역사, 철학을 얘기하지 않으면서 인문학을 하는, 인간을 통찰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인문학을 다시 보게 만들어 주었다.

     

    1. 인간이 그리는 무늬

     

    책 제목인 '인간이 그리는 무늬'는 인문을 뜻하는 말이다. '인'은 '인간'을 나타내고, '문'은 '무늬'를 나타낸다. 다양한 인간들이 삶 속에서 그리는 결이 다른 무늬, 개성있는 무늬, 인간이 걸어온 길 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인문학을 배우는 목적은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정체를 독립적으로 알아내기 위해 인문학을 배우는 것이라고 한다. 그럼 하나 더, 독립적으로 알아낸다는 것은 이념이나 가치관이나 신념을 뚫고 이 세계에 자기 스스로 우뚝 서는 일, 이것이 바로 인문적 통찰을 얻는 중요한 기반이다.

     

    2. 정치적 판단과 인문적 통찰

     

    정치적 판단은 대상이나 현상에 대해 '좋다' 또는 '나쁘다'로 판단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준이 필요하고, 그 기준에 해당되는 것이 신념, 이념, 가치관과 같은 것이다. 반면에 인문적 통찰은 정치적 판단과 결별하고 질문을 하는 것이다. 대상이나 현상은 문명의 큰 흐름 속에서의 어떤 조짐일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 정치적 판단을 하여 '좋다' 또는 '나쁘다'로 가르게 되면 그 조짐을 읽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단절시킨다. 따라서 인문적 통찰은 질문하면서 문명의 큰 흐름을 파악하면서 문명에 대한 이해, 인간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다.

     

    3. 이념과 가치관과 신념을 뚫고 나온 욕망

     

    신념과 가치관과 이념은 모두 집단에서 나와서 나에게 들어온 것이다. 결국 나로 인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와 충돌할 수도 있고, 나를 구속할 수도 있는 것이고, 나의 주인 행세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 온전히 나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에게만 있는 고유한 것은 무엇인가? 지은이는 '욕망'을 말한다.

    욕망은 '이곳'에 있는 자기를 '저곳'으로 끌고 가려는 힘이고 의지이며 충동이고 생명력이에요. 욕망이 거세된 인간은 '내'가 아닙니다. 

    무슨 일을 할 때에 '자기'가 그 중심에 있어야 한다. 자기가 아닌 사회나 국가를 위해서 그 일을 한다고 하면 그것은 사회를 위해서 개인의 욕망을 소외시키는 것이고, 그런 개인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진 사회는 욕망이 충족되지 않아 부조화스럽고 균열이 생기는 위태로운 사회가 된다. 결국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는 개인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진 사회가 건강하다는 얘기다. 자기만 잘 하면 그 사회는 잘 되게 되어 있다. 쓸데없이 우리 사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면에서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자기가 없기 때문이다. 행복의 주체로서 내가 없고, 이념과 신념과 가치관 속에서의 우리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념과 신념과 가치관은 이상적인 기준으로서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위치에 있어서 그 차이만큼 우리는 좌절하고 실망하고 자존감은 낮아진다. 그래서 행복하지 않은 것이다. 이를 행복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자기 긍정이 필요하다. 자기 욕망에 대한 이해도 함께....

     

    4. 덕: 신을 움직이는 내면의 힘

     

    '덕'이라는 개념은 은나라에서 주나라로 교체되는 상황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상제(하늘)의 마음이 떠나서 은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세워졌다는 도식에서 나왔다. 상제의 마음이 떠났다는 것은 은나라는 덕이 없었고, 주나라는 덕이 있었기 때문인데, 덕의 유무가 상제의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내면에 따라 하늘의 뜻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간의 내면이 바로 '덕'이다. 동시에 덕성의 발견, 이 덕성에 의탁한 행위, 이것이 바로 우리를 인문적 통찰로 끌고 간다.

     

    자기 몸을 천하만큼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덕이 있습니다. 하지만 천하를 자기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덕 대신에 이념이 있어요. 자기가 자기 활동의 동력을 이념에서 구한다면, 거기에는 자기가 존재하지 않아요. 자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 존엄에 대한 의식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어떤 행동을 해도 부끄러운 줄 모르지요.
    윤리적인 사회는 윤리 규정이 만드는 게 아니에요. 덕이 있는 개별적 존재들이 많아질 때 윤리적인 사회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자기 삶을 일상에서 영위할 줄 아는 사람이 많아질 때 윤리적인 사회가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념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보다 구체적인 자기 일상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많아지면 저절로 윤리적인 사회가 됩니다.

     

    5. 예술의 필요성

    우리가 인문적 통찰을 한다는 것은 뭡니까? 시멘트 콘크리트처럼 굳어져 있는 상태를 부드러운 상태로 볼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입니다. 명사적으로 세계를 보는 습관을 동사화하는 거지요. 점점 굳어가면서 명사화되어 가는 자신을 율동감이 있는 동사로 되살리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에게 바로 예술이 필요한 겁니다. 예술은 명사적으로 굳어진 나를 동사화하도록 자극시켜 주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단계를 미학적 삶이랄지 예술적 경지랄지, 이렇게 표현합니다. 인문적 통찰이 궁극적으로 도달하려는 지점이 바로 여기예요. 예술은 인간을 깨우는 활동이고, 그래서 인간의 덕이나 욕망은 예술적 힘이 뭉쳐 있는 요처라고 한다. '덕이 있는 삶'이나 '욕망이 주인인 삶'이 결국 미학적 삶으로 승화되는 이유이다. 

    예술과 욕망은 어느 정도 연결되는 것 같은데, 예술과 덕을 연결시킨 것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술을 좁은 뜻으로 보지 않고 넓은 뜻으로 '예술적'이라는 것으로 보게 되면 그 끝에서 '덕'을 만날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다. 

     

    그리고 명사적으로 세계를 보는 습관을 동사화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지식과도 관련이 있다. 지식은 사건이 일어난 후에 지식인들이 정리해 놓은 결과이다. 고정된 명사인 것이다. 이것이 의미가 있으려면 다음의 사건에 대한 예측이 가능해야 하고, 응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지식을 고정된 형태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고, 사건과 사건, 사건과 결과 사이의 유기적 관계를 통찰할 수 있어야 한다. 움직이는 동사인 것이다.  그럴 수 없다면 지식인이 아니고, 그가 가진 지식도 쓸모가 없다.

     

    지식은 무엇을 이해하는 데 머물러 있는 것이 되어선 안 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지식은 "아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모르는 곳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까지여야 합니다. 아는 것을 근거로 하여 우리에게 아직 열려져 있지 않은 곳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지식은 우리에게 뿌리로 기능하지 않고 날개로 기능할 것입니다. 한곳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날아갈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지식이 명사가 아니라 동사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세계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수학이 이러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수학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수와 관련된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현상을 수로 표현하는 것이다. 2차 방정식이든 미분이든 적분이든 결국 세상에 있는 어떤 현상을 수로 나타낼 수 없을까 하는 고민에서 시작된 것이다. 수학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의 연결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연결 관계를 알지 못하고 수학을 너무 이상화하는 문제에 빠진다. 수학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의 모든 학문, 예술, 문화도 구체적인 세계와의 연결 속에서 탄생한 것이고, 우리는 그 연결관계를 파악하고 움직이는 지식 속에서 인간의 무늬를 따라가는 인문적 통찰이 필요하다.

     

    6. 자기를 만나는 법

     

    첫째는 글쓰기이다.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에게 자신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글은 자기 표현이면서 동시에 몸속에만 머물기 버거운 영혼이 밖으로 뛰쳐나온 것이다. 블로그를 하면서 글을 쓴다고 하지만 영혼이 뛰쳐나올 정도로 몰입해서 글을 쓰지는 않는 것 같아서 좀더 자신을 드러나도록 훈련이 필요할 것 같다.

     

    둘째는 운동이다. 몸을 움직여서 한계를 경험하면서 자기 의식 속에 있는 자기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운동은 생활화되어 있다. 헬스나 자전거나 등산을 하면서 몸의 힘이 빠지고 숨이 찰 정도로 땀을 흘리면서 내 몸의 목소리를 듣는 경우들이 왕왕 있다. 

     

    셋째는 낭송이다. 낭송을 하면 읽는 내용이 육체적 감각을 건드려서 내면화하게 된다. 즉 체득이다. 낭송은 내가 처음 한글을 배울 때 소리 내어 읽을 때에 했었고, 애 키우면서 그림책 읽어줄 때 소리 내어 읽어봤던 것이 전부이다. 그 외에 낭송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지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다른 사람한테 방해되지 않도록 낭송하려면 나 혼자 있어야 하는데, 그게 그렇게 쉽지 않다.

     

    7. 지은이의 글과 나의 반성

     

    지은이의 글이 참 술술 잘 읽힌다. 경어체로 씌여져서 같이 얘기하는 듯한 느낌이고, 무엇보다도 이야기를 풀어가는 흐름이 자연스럽고, 예들은 구체적이다. 하나의 이야기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점을 바로 이어서 풀어주는 점이 좋았다.

     

    읽으면서 찔리는 것 중의 하나는 '우리'에 갇히지 말고, 독립적으로 자신이 우뚝 서야 한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 글을 쓰고 있는 과정에서도 지은이의 글에서 인상적인 부분을 그대로 발췌하는 내 모습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은이의 글대로 한다면 이 책을 읽고 몸 속의 영혼이 뛰쳐나와서 글이 되어야 하는데, 독립된 나는 존재하지 않고, 대신 지은이의 생각이 내 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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