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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50] 처음 읽는 일본사: 우리와 달랐던 길행간의 접속/역사 2016. 8. 19. 12:47
책이름: 처음 읽는 일본사
곁이름: 덴노·무사·상인의 삼중주, 일본
지은이: 전국역사교사모임
펴낸곳: 휴머니스트
펴낸때: 2013.04
이웃 나라 일본이지만 일본의 역사는 잘 머리에 들어있지 않다. 세계사 시간에 배운 것들이 있지만 백제와 교류했고, 임진왜란을 일으켰고, 무사들이 지배하고, 메이지유신을 하고, 조선을 병합하고, 군국주의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경제발전하는 정도가 내가 알고 있는 것 정도이다. 일본을 여행한다면 일본의 여러 문화들을 접할텐데 역사적인 지식 없이 보면 그런 것들이 가까이 다가올 것 같지 않았고, 너무 우리를 중심으로 일본을 보는 것보다 객관적으로 일본을, 일본의 역사를 보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읽게 되었다.
1.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 시대
일본의 구석기 시대는 기원전 만년전인데, 토기에 새끼줄 무늬가 있어서 조몬토기라고 불렸고, 그래서 이 시대를 조몬시대라고 한다. 그리고 수렵과 채집 활동이 중심을 이루었다.
기원전 3세기 경에는 금속 도구의 출현으로 농업이 발생하고, 생산량의 차이에 따라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생겨났다. 그리고 이무렵 야요이 토기가 등장하는데, 도쿄의 야요이 마을에서 처음 발견되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이 때는 청동기와 철기 시대에 해당한다. 이 시대에는 부족들이 경쟁하고 통합되면서 왕이 다스리는 작은 나라들로 발전해 가서 100여 개의 독립적인 나라들이 생겨났다.
3세기 경에는 통합과 몰락의 과정을 통해 30여 개국의 수장이 히미코 여왕을 맹주로 하는 연맹 왕국 야마타이국을 세웠다.
2. 야마토 정권-삼국시대
4세기에서 6세기 경에는 중앙 정치 조직을 갖춘 최초의 통일 국가인 야마토 정권이 세워졌다. 대형 고분이 많이 발견된 야마토 지역(지금의 나라 현)에 있었기 때문에 이름이 그렇게 불렸다. 야마토 정권은 한반도에서 불교와 철제 기술을 도입하여 발전하였다. 쇼토쿠 태자는 백제로부터 법, 학문, 기술 등의 문물을 받아들였고, 국가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덴노(천황)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여 자신에게 필요할 것을 주저 없이 받아들이는 일본의 정신은 이 때부터 나오게 되었다. 쇼토쿠 태자는 정치의 중심을 아스카로 정하고, 호류지를 완성하고, 불교 문화를 발달시켰다.
이 시기 일본과 한국의 교류에 대해서 한국은 선진적인 삼국이 후진적인 일본에 신문물을 전수해준 것으로, 일본은 삼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게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군사적으로 봤을 때 일본은 전략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대등한 세력이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당은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일본을 끌어들이려고 했던 측면에서 일본이 나름대로 발전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3. 다이카 개신-삼국시대
쇼토쿠 태자 사후 덴노 중심의 중앙집권 국가 건설을 위한 세력이 정권을 잡고, 모든 토지와 백성은 국가의 소유로, 덴노가 지배한다는 것을 선포한 다이카 개신을 진행한다. 수도도 아스카에서 지금의 오사카 지역인 나니와로 옮겼다. 덴무 덴노는 형이 자신에게 덴노를 물려주지 않고, 어린 조카에게 물려주자 백강전투에서 승리하여 덴노에 오르면서 세력을 동일본까지 넓힐 수 있었다. 그러면서 강력한 덴노 중심의 국가로 자리 잡았다. 국호를 '왜'에서 '일본'으로 바뀐 것도 이 때이다. 거기다가 신도를 정비하면서 덴노가 태양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후손이라고 공식화하여 덴노를 신격화하였다.
4. 헤이조쿄와 헤이안쿄-삼국시대
덴노의 권위가 강화되면서 수도를 넓은 곳으로 옮길 필요가 제기되어 아스카로 왔다가 다시 지금의 나라 지역에 '헤이조쿄'를 세워 정지와 경제를 발전시켰다. 이 시기에 황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편찬하였다. 그러다 간무 덴노 시기에 나라의 분위기가 어수선하여 수도를 '헤이안교'(지금의 교토)로 옶겼다. 나라와 교토에 문화재가 많은 이유가 이 시기에 수도로서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5. 무사의 등장-삼국시대+고려시대
다이카 개신 이후 토지는 국가가 소유했지만 국가는 백성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고 세금을 걷었다. 그런데 나중에는 땅이 모자라게 되자 개간을 허용하여 사유지를 갖게 되었고, 귀족들은 이러한 땅들을 빼앗아 장원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영주들은 장원을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하는 집단을 두게 되었고, 이들을 무사라고 했다. 무사들은 영주를 위해 존재했지만, 점점 세력이 커져서 영주의 횡포에 대항할 수 있게 되었고, 이들은 다이라 가문과 미나모토 가문이 전국의 지배권을 두고 10년 동안 겐페이 전쟁을 벌여 미나모토 가문의 요리토모가 승리하여 무사가 정권을 잡는 시대를 열게 되었다.
6. 가마쿠라 바쿠후-고려시대
1192년 미나모토 요리토모는 쇼군에 취임하면서 가마쿠라 바쿠후를 세웠고, 쇼군은 덴노에게 통치를 허가받는 모양새를 취했다. 그러나 바쿠후가 일본 전체를 통치한 것은 아니어서 교토의 조정과 귀족들은 여전히 위세를 부렸다. 그러다 덴노 측에서 무사들을 모아 가마쿠라 바쿠후에 반기를 들었고, 요시토모의 아내인 마사코는 무사들을 모아 이에 맞섰다. 결국 바쿠후의 무사들이 승리하여 바쿠후는 일본 전국을 통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조큐의 난이라고 한다.
13세기 여몽 연합군이 일본 원정을 하였으나 두 차례의 태풍으로 실패하게 되고, 이 때의 태풍을 신의 바람, 즉 가미카제라고 불렀다. 이를 통해 일본인들의 신도 사상은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몽골의 침입으로 일본은 전국의 무사들을 바쿠후가 장악할 수 있게 되면서 바쿠후의 영향력이 커지고 조정과 귀족들은 약화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방어전쟁이었기 때문에 전리품이 없었고, 결국 전쟁을 직접 치른 고케닌(쇼군에 충성을 서약한 무사)들은 아무런 이익이 없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고다이고 덴노 측에서 거병하여 바쿠후 타도를 외쳤고, 결국 가마쿠라 바쿠후는 최후를 맞았다.
7. 무로마치 바쿠후-조선 전기
그러나 고다이고 덴노 편에 섰던 무사 다카우지는 덴노 측에서 새로운 궁전을 짓는 데에 무거운 세금을 매기려 하자 무사와 농민들을 규합하여 다시 바쿠후를 세우자고 하면서 거병하여 새로운 덴노를 즉위시키고, 무로마치 바쿠후를 열었다. 패배한 고다이고 덴노는 교토 남쪽으로 탈출해서 새로운 조정을 세우고 맞섰다. 결국 고다이고 덴노가 세운 남조와 다카우지에 의해 세워진 교토의 조정인 북조로 대립하게 되었다.
8. 전국시대-조선 전기
남북조의 혼란으로 지방관인 슈고의 권한이 커지자 무로마치 바쿠후는 권위가 점점 떨어졌고, 결국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던 8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자신의 동생에게 쇼군을 넘겼다가 뒤늦게 낳은 아들에게 다시 쇼군을 넘긴다고 번복하여 두 세력 사이에 충돌이 생기는 오닌의 난이 일어나서 11년이나 전쟁이 지속되게 된다. 이러한 내란으로 무로마치 바쿠후는 슈고와 지방 무사들을 통제하지 못하고, 붕괴하게 되었고, 권력은 중앙의 영향력을 벗어나 지방에서 무력을 갖춘 센고쿠 다이묘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들이 자신의 땅을 넓히기 위해 전쟁하던 시기가 전국시대이다.
9. 전국 통일-조선 전기
오다 노부나가는 포루투갈로부터 조총을 받아들여 다른 세력들과 차원이 다른 전쟁을 벌여서 승리해 나가서 전국통일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을 때 부하의 배신으로 죽게 된다. 노부나가의 심복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반란군을 진압하고 노부나가의 전투 기술을 더욱 발전시켜 전국을 통일하게 된다. 통일 이후 할 일이 없어진 무사와 토지를 넓히려는 다이묘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조선을 침략하였으나 전쟁이 장기화된 상태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는다.
히데요시가 죽자, 임진왜란에 참여했던 '무단파'와 일본에 남아 보급을 담당했던 '문치파'로 나뉘어 대립했다. 무단파는 무력으로, 문치파는 학문과 법령으로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처음에는 중립을 지키다가 전쟁이 일어나자 무단파에 합류하여 전쟁을 지휘하여 승리하였다.
10. 에도 바쿠후-조선 후기
이에야스는 자신의 근거지인 에도에 바쿠후를 세우고, 쇼군에 올랐다. 에도 시대에는 도시가 발달하였다. 산킨고타이 제도 때문에 전국의 다이묘들이 에도 자주 드나들면서 각 지역과 에도를 잇는 도로가 발달하였고 전국적으로 화폐가 통일되어 일본 전역이 하나의 상권으로 묶여 거대 시장이 형성되었다.
산킨고타이란 지방의 다이묘들을 격년으로 에도로 불러들여 강제로 머물게 하는 제도이다. 바쿠후의 권위를 세우고 다이묘들을 통제하기 위한 제도였다. 다이묘들은 가족들과 함께 올라왔다가 내려감으로써 정치적, 경제적 기반을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도시의 발달과 동시에 서양의 교류가 시도되었으나 크리스트교 포교를 하려고 해서 쇄국정책을 실시했으나, 포교에는 관심이 없던 네덜란드하고만 무역을 하였다. 네덜란드인들은 나가사키의 데지마에서만 거주하면서 무역을 하였다.
문화적으로도 발달하였는데, 목판에 찍은 풍속화인 우키요에가 번성하였고, 이러한 그림은 네덜란드 상인을 거쳐 유럽에까지 전파되어 인상파 화가인 고갱이나 고흐의 그림에까지 영향을 미쳤따.
11. 개항
아편전쟁으로 중국이 영국에게 문호를 열자, 이를 바라본 바쿠후는 이러한 일을 자신들도 당하지 않기 위한 대비를 세웠고, 아시아, 태평양으로 진출하려는 미국이 2차례 개항을 요구하자 조약을 체결한다. 바쿠후의 힘이 약해지자 바쿠후를 중심으로 한 개국파와 바쿠후에 불만을 가지고 덴노를 중심으로 존왕양이 운동을 해야 한다는 반개국파가 나눠졌다.
그러다 사쓰에이 전쟁이 일어났는데, 사쓰마 번의 무사들이 영국인을 살해한 것이다. 이에 영국이 사쓰마 번을 공격했고, 사쓰마 번은 무릎을 꿇었다. 한편 조슈 번도 미국 상선을 포격했다가 서양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패배하였다. 직접 서양의 힘을 경험한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은 서양에 맞서는 것은 어리석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실력을 키우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을 갖고, 이를 위해 바쿠후를 몰아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기에 이른다.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은 통상을 통해 경제력을 키우고 난 후, 서양 선박과 무기를 사들여 전쟁 준비를 하였다.
12. 덴노 중심의 신 정부
한편 바쿠후는 이런 조슈 번을 그대로 둘 수 없어 공격을 했지만, 목적을 이루지 못했고, 바쿠후의 권위는 더 떨어졌다. 거기다 조정은 조슈 번과 사쓰이 번의 무사들이 장악하여 에도 바쿠후의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조정 대신과 다이묘들을 불러 쇼군의 지위를 내려놓고 모든 권력을 덴노에게 이양하는 '대정봉환'을 제출한다.
덴노 중심의 신 정부는 대외적으로 서양과 맺은 조약을 이행하겠다고 하여 열강의 지지를 얻었다. 수도를 에도로 정하고, 이름을 서쪽의 교토에 대응하여 도쿄로 지명을 고쳤다. 그리고 덴노의 궁성을 도쿄로 옮겼다. 이 때의 덴노가 메이지 덴노이다.
13. 메이지 유신
신정부는 중앙집권화를 위한 정책을 시행했다. 토지와 백성을 덴노에게 반환한다는 '판적봉환', 번을 없애고 현을 설치하는 '폐번치현', 호적법을 시행하여 상층귀족과 다이묘는 화족, 무사는 사족, 농민과 상인과 수공업자와 천민은 평민으로 구분하였다. 또 징병제를 실시하여 군사적 의무를 부과했는데, 모든 남자가 군대를 간다는 사실이 무사들에게는 충격이었다. 평민과 구별되는 무사의 특권도 사라졌다. 재정의 안정을 위해 조세 제도를 개혁했고, 덴노의 권위를 강화하고 신격화하기 위해 신도를 국교로 삼았다.
신정부 지도자들은 서양처럼 되겠다는 목적은 뚜렷했지만 방법에 대한 계획이 없었다. 이에 이와쿠라 사절단을 꾸려 미국과 유럽을 2년동안 돌아다니면서 부국강병의 밑그림을 그렸다. 이무렵 후쿠자와 유키치는 서양 문명의 진보와 발전에 대한 책으로 지도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부국강병의 열쇠는 산업화라는 것을 깨닫고, 산업 육성 정책을 펴서 자본주의 발전의 기초를 닦았다. 이 때 관영 공장을 인수한 미쓰이, 미쓰비시 등은 훗날 재벌로 성장했다. 산업화 정책으로 태양력 채택, 하루 24시간, 일주일을 7일로 하는 공통의 시간을 마련하였고, 철도를 개통했으며, 다양한 신문들이 만들어졌다. 의식주의 변화도 있었는데, 단발령을 시행했고, 양복과 구두를 신는 사람들이 늘었다. 쇠고기와 빵을 먹는 사람들도 생겼다. 대외적으로는 조선을 강제로 개항하고, 류큐 왕국을 정복하였다.
14. 헌법 제정
근대적 교육기관으로 소학교와 중학교의 학제가 개편되고, 고등교육기관인 도쿄대학이 설립됐다. 신분제 개편 이후 무사 계급은 대우를 받지 못했고, 잦은 반란을 일으켰지만 결국 사족들은 관료나 실업가가 되었고, 일부는 자유 민권 운동을 전개하여 조슈 번과 사쓰마 번 중심의 신정부에 대항하였다. 자유민권운동은 의회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는 부농과 상공업자에게까지 확산되어 헌법과 의회를 개설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정부는 이토 히로부미에게 헌법 제정을 맡겼고, 히로부미는 신흥국가인 독일과 일본의 상황이 비슷하다고 생각해서 독일 헌법을 모델로 헌법 제정 작업을 했다. 그리고 1889년, 메이지 헌법이라 불리는 대일본제국헌법을 발표하였다. 덴노에 대한 신격화, 15엔 이상의 세금을 납부하는 30세 이상 남자에게만 투표권 부여 등은 근대 국민 국가의 헌법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언론과 결사의 자유, 3권 분립 등은 민주주의를 향한 일본의 첫걸음이었다.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헌법을 제정하고, 국회를 개의한 것에 대한 자신감은 청에게서 조선을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일청 전쟁을 벌여서 랴오둥 반도를 얻었으나 열강의 요구로 배상금만 받고 다시 반환하였다.
15. 1,2차 산업 혁명
일본의 제1차 산업 혁명은 방적업과 직물업 중심이었고, 삼국간섭으로 군사력 강화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제철업에 투자하여 군수산업 중심의 중공업을 발달시켰다.
러시아의 남하정책으로 일본은 조선과 만주에서 충돌하였고,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등으로 긴장이 고조되었으며, 영국의 제안으로 동맹을 맺고, 러시아를 공격하여 일러 전쟁을 일으켰다. 2년간 계속되다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가 종전을 할 기미를 보이자 미국의 중재로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약의 결과 일본은 조선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러시아는 사할린 남부를 갖게 되었다. 일러 전쟁 전후하여 일본은 영국의 인도에 대한 독점권을,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독점권을 서로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하였다.
일청 전쟁과 일러 전쟁을 거치면서 산업화에 성공한 일본은 조선을 기반으로 만주로 진출할 준비를 하였다. 또한 1911년 관세자주권을 회복함으로써 불평등 조약 개정을 완전히 이루어서 국내 산업을 보호할 수 있게 되었고, 더 많은 수출로 경제적 부를 추구하게 되었다.
15. 제1차 세계대전
서구 열강이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에 집중하면서 아시아에는 신경을 쓰지 못하면서 일본은 이 기회에 동아시아에서 세력을 뻗으려 하였다. 그래서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연합국으로 참전하였고, 독일이 차지하고 있던 산동반도를 공격하여 차지하였다. 또한 전쟁으로 인해 유럽이 차지하고 있던 아시아와 미국 시장을 일본이 차지하면서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거기다 유럽 전역에 선박이 부족하자 일본의 조선업과 해운업이 호황을 맞았고, 일본은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바뀌었다. 거기다 제철업도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일본은 승전국으로서 적도 이북의 독일령 섬들을 차지했고, 국제연맹의 상임이사국이 되었다. 미국을 중심으로 일본의 팽창을 견제하기 시작해서 군축 조약을 맺었고, 워싱턴 회의 이후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위상이 전쟁 전과는 크게 달라졌다.
16. 민주주의의 발전
종전 후 전쟁 특수가 사라지자 일본은 불황에 빠졌고, 노동쟁의, 정치 참여의 확대를 요구했으며, 영화와 레코드 같은 새로운 미디어도 등장했다. 특히 지식인들이 덴노를 내세운 번벌 정치에 저항하여 헌법에 따라 정당을 만들고, 투표에 따라 다수당의 당수가 수상이 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1924년 번벌의 저항을 꺾고 다수당의 당수가 수상이 되는 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투표권은 여전히 제한이 있었지만 다시 보통 선거권을 요구에 1925년 25세 이상의 모든 남자가 선거권을 갖게 되었다.
산업혁명의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늘어났고, 노동자들의 임금인상과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파업이 일어났다. 사회주의 사상도 급속히 번져갔다. 치안유지법은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적용 범위를 넓혀서 정부에 비판적인 사람들을 처벌하기 위한 악법으로 변질되었다.
의식주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는데, 옷은 대부분 양장과 양복, 식생활은 쌀밥과 빵, 소고기 등. 이 때 돈가스와 고로케, 카레라이스가 등장하였다. 주거 생활에도 좌식에서 입식으로 문화가 변화하였다.
17. 군국주의
종전 후 유럽이 부흥하자 일본 경제는 불황에 빠졌고, 간토 대지진과 미국의 대공황으로 일본의 경제에 타격을 주었다. 국민들은 정부의 정책에 불신하고 기업과 유착한 정치인의 부패사건으로 분노했으며, 반대로 군부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군부는 경제회복의 열쇠는 전쟁이고, 덴노를 중심으로 일체감을 이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흐름에서 간토군이 만주 침략을 감행했고, 국민들은 지지했다.
1932년 5월 15일, 청년 장교들이 수상 집무실에 침입하여 군부의 계획에 반대하는 자는 누구도 용서할 수 없다며 수상을 암살했다. 그들은 군부에서 수상이 나와야 한다면서 민주적인 정당 정치를 부정하고, 군부에 의한 군사 정권 시대로 바뀌었다. 경제 역시 전쟁 수행에 유리한 군수 공업 중심으로 변화했다.
18. 제2차 세계대전
일본은 결국 중국을 침략했고, 독일과 이탈리아는 일본의 침략을 지원했다.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1941년 하와이 진주만을 폭격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핵무기를 사용하여 일본은 항복하였다.
한편 오키나와는 일본이 본토 방어에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해 희생당하였다. 오키나와 주민들을 전면에 내세워 민간이 20만명이 자결하도록 강요하였다. 종전 후에도 미국령으로 있다가 1972년에야 일본에 반환되었지만 미군이 주둔하여 비극은 계속되고 있다.
19. 종전 후
종전 후 일본은 연합국 최고사령관인 맥아더가 통치를 했고, 맥아더는 일본을 비군사 국가로 만들고, 정치적으로 민주화를 실현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를 위해 군수품 생산 금지, 육해군 해체, 전범 체포, 전쟁 주장 정치인 추방 등을 시행했다.
그리고 일본 헌법의 기본 원칙을 제시했다. 덴노는 '상징적'으로만 국가를 대표하며, 일본은 영원히 전쟁을 포기한다는 내용이었다. 일본의 평화헌법은 이 원칙에 따라 제정되었다.
20. 점령 정책의 수정
중국이 공산화되고, 한국이 분단되면서 동아시아가 공산권의 위협을 받자, 미국의 점령 정책은 일본을 반공의 방벽으로 내세우는 보수적인 방향으로 수정되었다. 공산당의 정치 활동은 금지되었고,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이 이루어졌다. 이 틈을 타 전범들이 슬그머니 정계로 복귀했고, 일본주의 재무장이 진행되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은 연합국과 강화조약을 체결하여 국제사회에 다시 복귀했고, 1952년 일미안보수호조약의 체결로 미군정은 끝나고 정식 정부가 출범하였다. 정부의 출범으로 군정 기간의 제도를 수정하였고, 보수 세력이 국가주의 정책을 강화해 나갔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진보 세력이 사회당으로 통합되어 총선거에서 의회 1/3을 차지하여 헌법 개정을 막을 수 있었다. 진보 정당 사회당이 선전하자 보수 세력이 결집하여 자유민주당으로 뭉쳐 의회의 2/3를 차지하는 거대 정당이 되어 55년 체제가 막이 열렸다.
21. 군사대국화와 평화헌법 개정 추진
60~80년대까지 일본의 경제는 성장하였지만 군사력 없는 경제 성장은 허망함을 깨닫고 군사 대국화를 추구한다. 또한 장기불황으로 일본의 청사진으로 군사 대국화가 제시되었고, 국가주의를 내세운 우익세력은 역사 교과서 왜곡과 같은 사건을 통해 정체성 찾기를 시도하였다.
일본의 역사를 짚어보면서 일본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고, 일본이 어떻게 우리와 다른 길을 가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니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 과정과 제1,2차 산업혁명으로 산업화되는 과정이 우리와 달랐음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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