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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39] 처음 읽는 미국사: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새로운 미국의 역사행간의 접속/역사 2016. 7. 8. 15:26
책이름: 처음 읽는 미국사
곁이름: 인종과 문화의 샐러드, 미국
지은이: 전국역사교사모임
펴낸곳: 휴머니스트
펴낸때: 2010.11
전국역사교사모임에서 지은 미국사이다. 미국의 역사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은 20세기 들어와서 세계사 속에 등장하는 미국의 모습이 거의 전부였다. 그 이전에 유럽에서 처음 이주했을 때,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을 때, 남과 북이 전쟁을 했을 때, 산업화될 때 등의 역사는 그 말만 알고 있을 뿐이지 그 과정, 그 전후의 달라진 것들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서 꽤 많은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을 중심으로 내용을 정리해보았다.
1. 유럽인의 식민지 건설
유럽인이 아메리카에 와서 정착을 하는데, 이 때에는 주로 영국이 적극적으로 이민을 권유해서 식민지를 삼은 곳이 많다. 그러나 이 때 식민지라는 의미는 본국에서 옮겨 간 사람들이 만든 땅이라는 의미이고, 수탈과 억압, 예속 관계로 성립되는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와는 다르다고 한다. 나는 여태까지 식민지라는 말에 이런 두 가지 의미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이런 의미가 있었다.
유럽에서 도착한 사람들은 보스톤을 중심으로 정착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아메리카에 도착하는 배 안에서 자치와 사회 계약을 통한 정부 수립을 위한 '메이플라워 서약'을 하였고, 정착하면서 성인 남성이 참가하는 총회와 법률을 만들고, 관리도 선출했다. 그리고 목사나 교사를 길러내기 위한 하버드대학을 세웠는데, 이는 자신이 떠나온 영국의 캐임브리지대학의 양식을 본떴다.
읽으면서 지명의 유래들이 나오는데, 펜실베니아는 퀘이커교도인 윌리엄 펜이 건설한 식민지인데, '펜의 숲이 있는 지방'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중심도시인 필라델피아는 '우애의 도시'라는 뜻이다. 뉴욕에는 허드슨강과 맨허튼이 있는데, 이 강에 처음 도착한 헨리 허드슨의 이름을 따와서 지었고, 맨허튼은 원주민들의 말로 '언덕으로 이루어진 섬'이라는 뜻이다. 이후 네덜란드인들이 이 지역을 '뉴네덜란드'라고 하였고, 특히 맨허튼 주변을 '뉴암스테르담'이라고 했다. 그러다 뉴잉글랜드의 인구가 늘어나자 영국인들이 새로운 땅으로 눈길을 돌렸고, 두 나라 사이에 짧은 전쟁을 치르고 뉴암스테르담을 영국인들이 차지하게 되어서 영국 왕 찰스 2세는 자신의 동생인 요크 공에게 이 식민지를 선물로 주어서 이름을 '뉴욕'이라고 바꾼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성립된 영국의 식민지는 13개였다. 뉴잉글랜드 지방의 뉴햄프셔, 매사추스츠, 로드아일랜드, 코네티컷 등 4개, 중부 지역의 뉴욕, 뉴저지, 펜실베이니아, 델라웨어 등 4개, 남부 체서피크 만 지역의 버지니아, 메릴렌드 등 2개, 남부 지역의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 조지아 등 3개, 총 13개였다. 당시 플로리다는 동서 플로리다가 있었는데, 모두 에스파냐 영토였다.
2. 독립혁명
프랑스는 미시시피 강 일대와 북아메리카 서쪽 내륙 지역의 소유권을 주장했는데, 자신들의 왕인 루이 14세 왕의 이름을 따서 '루이지애나'라고 하였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는 충돌을 하였고, 1760년 영국이 승리함으로써 미시시피 강 일대와 캐나다 일대의 식민지를 영국이 차지하게 되었다. 동시에 미시시피강 서쪽은 에스파냐에 넘겨주고, 에스파냐는 플로리다를 영국에 넘겨주었다.
영국에서는 아메리카에 있는 영국 식민지에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았다. 청교도 혁명이나 명예 혁명 등 영국 국내 정치 상황이 워낙 급변했기 때문에 아메리카에 신경 쓸 여지가 없었다. 그러다 정치가 안정화되자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진 빚을 갚기 위해 아메리카 식민지에 세금을 부과했다. 이에 식민지인들이 반발하였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영국인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아메리카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국의 지배가 싫어서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에 왔는데, 영국에 세금을 내야 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스톤 차 사건이 터진 것이다. 식민지 청년들이 보스톤 항에 정박 중이던 동인도 회사의 배를 습격한 것이다. 영국은 이에 대해 보스톤 항을 폐쇄하고, 해당 사건의 재판을 영국에서 하는 등 강경한 조치를 내리자 식민지인들이 단결하여 식민지 대표 55인으로 구성된 대륙회의가 열렸다. 식민지에 처음으로 자신들의 뜻을 대표하는 권력기구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식민지 강경파 청년들이 만든 민병대와 영국군이 충돌하여 전쟁이 시작되었고, 대륙회의에서도 식민지 연합군을 창설하였으며, 펜실베이니아가 주 정부를 수립하며 독립을 선포하였다. 이후 대륙회의에서 독립 선언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하여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독립선언서는 프랑스 인권 선언서와 함께 근대 민주주의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문서로 평가받는다. 인간의 기본권, 자유와 평등, 인민의 동의에 기초한 정부의 수립, 인민의 의사를 무시한 정권을 뒤엎을 수 있는 혁명권 등을 분명히 밝혀, 그들이 건설할 새로운 사회, 새로운 국가에 대한 희망과 기본 원칙을 담았다.
초반의 전세는 영국이 우세하였다. 영국은 훈련된 정규군이었고, 식민지 연합군은 훈련되지 않은 민병대 중심이었으니까. 그러나 영국과 대립하던 프랑스가 식민지군을 지원하였고, 에스파냐와 네덜란드도 식민지군을 지원하였다. 결국 본토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쟁을 치르던 영국군은 보급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서 사기가 떨어지고 마침내 연합군의 기습공격으로 식민지군이 승리하였다.
3. 미국의 탄생
먼저 독립적인 13개 주의 연합이 국가를 결성하였고, 정식 명칭 미국(United States of America)을 걸졍했다.
그 다음 이들이 연방 정부의 역할에 대해서 고민하였다. 강력한 연방 정부는 국민의 자유와 기본권을 제한하고, 각 주의 자율성을 침해할 수 있으므로 권한을 축소하자는 주장과 다른 나라와의 무역이나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강력한 연방정부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대립하였다. 결론은 견제와 균형의 원리로 권력을 분산하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거부권, 의회는 대통령의 임명시 승인, 사법부는 위헌 결정을 통해 입법부와 행정부 견제하는 것이다.
또한 연방 의회를 구성할 때 각 주마다 인구수가 다르고, 이해관계도 다른 상황에서 어떤 기준으로 구성하느냐 하는 것도 문제였다. 결국 상원은 인구수에 관계없이 각 주마다 2명씩, 하원은 인구 비례에 따라 의석수를 나누기로 하는 식으로 절충하였다.
독립선언과 독립전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한 후 아메리카 주민들은 최초의 민주 공화국 미국을 탄생시켰는데, 그 과정이 힘들었지만 과연 민주적이었다. 의견은 엇갈리고 이해관계도 대립되었지만 토론하고, 타협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문제를 해결하면서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면서 모두에게 이익이 되도록 한 것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미국의 헌법이 만들어졌는데, 이 헌법은 인간의 자유와 권리, 민주주의 발전 과정을 담았고, 단순한 선언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그 선언이 현실 정치에서 적용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확립했다는 것이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4. 미국의 정치와 파당
미국의 대통령 선거는 간접선거이다. 국민들은 대통령선거인단을 뽑으면 그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뽑는 방식인데,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했던 독립시기의 제도가 그대로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선거인단은 각 주에서 상원 2명씩 100명에다가 주별 인구비례에 따라 3명~55명씩 배정된다. 각 당의 대통령 후보는 주별 선거를 통해서 선거인단을 확보해야 하는데, 그 주에서 승리하면 그 주의 선거인단을 모두 배정받는 방식을 취한다. 그래서 투표수로는 이기고도 선거인단 수에서 밀려서 선거 결과가 바뀌기도 한다.
워싱턴 정부가 출범했지만 연방정부의 위상과 관련된 대립은 계속된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귀족주의자로 정부가 강력한 힘으로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상공업의 발달을 위해 연방 은행을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토머스 제퍼슨은 국민 대중의 권리와 역할을 강조하면서 국가의 힘은 질서를 유지하는 최소한도로 작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농업 중심의 국가 발전과 연방 은행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국과의 2차 전쟁을 통해서 연방은 강화되었고, 연방파와 민주공화파의 대립은 의미가 없게 되었다. 결국 연방 정부가 미국의 중심이 된 것이다.
1800년대가 되자 미국은 미시시피강 주변의 뉴올리언스를 사들이기로 결정하고 협상단을 프랑스로 보냈는데, 프랑스를 지배하던 나폴레옹은 혁명정부를 무너뜨리려는 여러 세력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고, 멀리 아메리카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없던 차에 미국 협상단이 오자 미국 중부의 루이지애나를 전부 팔겠다고 해서 미시시피강 서쪽이 대부분 미국의 땅이 되었다.
1845년에는 텍사스 공화국이 멕시코에서 독립한 후에 미국에 병합되었고, 1846년에는 오리건 지역을 병합하였고, 1848년에는 캘리포니아 등 서부지역을 멕시코로부터 넘겨받았다. 이로써 미국은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아메리카 대륙을 차지하게 되었다.
1828년 앤드류 잭슨이 대통령이 되었는데, 이전 대통령들이 다 부유층 출신인데 반해 그는 서민 출신의 대통령이었다. 영국과의 전쟁에서 민병대를 이끌고 많은 승리를 함으로써 명성을 떨쳤고, 이를 기반으로 대통령이 된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 후보 선출도 밀실에서 하지 않고 전당대회를 통해 선출하였다.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하는 대중 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의 재임 기간 중에 정당 정치가 확립된 것도 큰 변화이다. 잭슨을 지도자로 하는 민주당은 주로 농업 세력을 지지 기반으로 했고, 보호 관세와 연방 은행을 통한 금융 정책에 반대했다. 반대인 휘그당은 강력한 연방 정부가 보호 관세를 통해 국내 산업을 보호하고, 금융통화 정책을 통해 상공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로 동북부와 서부 상공업 세력의 지지를 받았다.
1850년대 노예제가 미국 정치계의 핵심문제로 떠오르면서 정당 체계의 변화가 발생했는데, 민주당은 남부 출신의 의원들이 대부분이라서 노예제를 찬성했지만, 휘그당은 입장을 정리하지 못했다. 결국 휘그당에서 노예제를 반대하는 세력이 따로 정당을 만들면서 휘그당은 해산되고, 새로운 정당에는 노예제에 반대하는 민주당의 일부 세력이 결합하여 지금의 공화당이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노예제 찬반을 놓고 농업 중심의 남부와 상공업 중심의 북부가 대립하는 남북전쟁이 일어났고, 링컨의 노예해방선언으로 북부가 승기를 잡게 된다. 분열된 남과 북이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적극적인 화해 정책이었는데, 남부에 대해서 책임을 묻지 않고, 연방으로 존속을 시키면서, 이전의 권리를 모두 인정하는 정책을 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화합의 정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산업이 발달하고, 서부가 개척되면서 미국의 경제가 발달하는데, 그러면서 자본가만이 이익을 취하는 자본주의의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한 때에 제26대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공정하고 균형 있는 정책으로 국민들의 환영을 받는다. 이 때에는 늘 고용주 편에 섰던 과거의 정부와 달리 노동 분쟁에서 적극적인 실태 조사와 중재를 하고, 때로는 단호한 태도로 노동자에게 힘을 실어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20세기가 된 것이다. 20세기 미국의 역사에서 내가 새롭게 안 것은 뉴딜 정책 이후의 정치 지형이었다.
미국 정치에서 민주당은 오랫동안 소수아지 분열되고 약한 세력이었다. 그러나 뉴딜로 그 후 몇십 년동안이나 민주당이 정치적으로 공화당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특히나 흑인들은 1932년만 하더라도 대부분 공화당을 지지했으나, 1936년 선거에서는 대다수가 오히려 민주당에 표를 던졌다. 지금도 대부분의 흑인이나 미국 내 소수 민족, 노동자 조직 등 사회적 약자들이 민주당의 주요 지지 기반이다.
또하나 미국의 역사는 아니었지만 쿠웨이트가 이라크의 일부였다는 것도 알았다. 1990년에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면서 걸프전이 일어났는데, 쿠웨이트는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이라크 남부 바스라 주에 속해 있었다. 그러다가 석유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된 영국이 이라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국경선을 긋고 그 지방의 토호 가문을 왕가로 세워서 쿠웨이트 왕국을 독립시킨 것이다. 그래서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걸프전 당시에 이런 얘기들을 왜 못봤는지 알 수가 없다.
20세기의 미국사는 사실 미국만의 역사가 아니었다. 미국이 개입하지 않은 곳이 별로 없다보니 결국은 세계사였다. 그만큼 미국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이겠고, 나쁘게 보면 패권국의 오만이기도 했다.
읽으면서 가장 궁금했던 것은 캐나다의 역사였다. 캐나다는 어떻게 성립하고 발전했을까? 분명히 미국하고 비슷하게 개척되고, 함께 갈 수 있는 측면이 많았는데, 조용하게 자기 갈 길을 가면서 발전을 한 것 같다. 미국의 역사에서는 캐나다와의 관계가 나와 있지 않다. 둘은 별로 충돌한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어떻게 협력했다는 것도 보이지 않는다. 영국의 식민지로 있다가 자연스럽게 독립한 것인가? 나중에 캐나다의 역사도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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