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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 77] 호모 코레아니쿠스: 한국을 비추는 거울같은 책
    행간의 접속/사회 2009. 9. 18. 16:56
    호모 코레아니쿠스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진중권 (웅진지식하우스, 2007년)
    상세보기

    진중권이 한국 사회에 대해서 심각하지 않으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쓴 글이다. 전체가 3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근대화, 전근대성, 미래주의로 나뉘어져 있다. 농경사회에서 산업화가 되고, 정보화 사회로 가는 이 때에 100년 남짓한 기간에 변화를 겪었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 섞여 있는 근대적인 모습, 전근대적인 모습, 미래주의적인 모습들을 살펴본 것이다.

    1. 근대화

    회사에서 마라톤을 인사고과에 반영한다고 하자 마라톤 훈련을 하던 직언이 숨졌다. 회사는 명시적으로 강요하지 않았고, 자발적으로 했다.
    어쩌면 숨진 그 직원도 자신의 마라톤 연습이 강요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것이라 믿었을지 모른다. 자발적이면서도 강제적인 신체 만들기, 이는 한국 사회에 널리 퍼진 현상이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제 몸을 기업의 요구에 맞게 뜯어고친다. 언뜻 자발적인 것으로 보이나, 이 '존재미학'은 실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강요한 '생존미학'일 뿐이다.
    보이지 않는 강요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는 사실이 무섭다. 나의 자발성이 사실은 강요된 자발성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자발성, 나를 위한 자발성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의문이 든다.

    2. 전근대성

    다수의 사람들이 판단하는 사회는 합리적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저발전의 사회는 당면한 문제에 대해 주술적으로 접근하고, 고발전의 사회는 기술적으로 접근한다. 주술적 사유는 부정을 타게 한 '범인'을 잡으려 하고, 기술적 사유는 사태의 '원인'을 찾아내려 한다. 한국 정치에 나타나는 강한 주술성은 다른 모든 미시 영역의 활동에서 드러나는 주술성의 요약에 불과하다. 한국 사회가 발전하려면 성원들이 주술성에서 벗어나 사회적 문제를 과학적으로 인식하여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기술성에 도달해야 한다.
    최근 2PM의 박재범이 마녀사냥식으로 얻어맞아서 미국으로 쫓겨간 모습을 볼 때 이 사회가 상식이 있는 합리적인 사회인지 의심이 든다. 문제가 아닌 것을 문제화하고 범인을 만들고 쾌감을 즐긴다. 전근대적인 모습의 전형이다.

    우리 사회가 창의성이 부족하면서 보수적인 성격을 갖는 것에 대해서 얘기한다.
    시장이라는 원초적 폭력의 세계에서 생존하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수'에 속해야 한다. 무슨 일에서든 유난히 '쏠림' 현상이 심한 것은 실은 고립되는 것에 대한 공포감 때문이다. 다수 속에서 안전함을 느끼고, 소수 속에서 불안함을 느끼는 사회에서 혁신과 창안을 위한 용기는 설 자리를 잃는다. 이런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낡은 습관에 따라 행해진다. 이렇게 공포는 습관을 낳고, 이 두 가지가 짝을 이루어 한국인의 보수성을 구성한다.

    3. 미래주의

    2006년에 있었던 지하철 결혼식 사건에 대해서 얘기한다. 가난한 남녀가 돈이 없어서 지하철 승객을 대상으로 눈물의 결혼식을 올린 사건으로 전국을 눈물로 만들었는데, 가짜란다.
    이 사건들에서 전근대성과 탈근대성은 하나가 된다. 남이 하는 일에 과도하게 관심을 갖고, 부도덕한 자를 찍어 집단으로 조리돌림을 하고, 냉정하게 사실을 확인하기 전에 뜨겁게 '감동'부터 받고 싶어하는 이야기 문화는 전근대적 심성에 속한다. 이 전근대적 감성이 첨단 IT와 결합하면서 서구의 그 어느 나라보다 더 포스트모던한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구술문화를 얘기한다. 구술문화는 문자문화와 달리 이성적이지 않고 정서적이며, 논리적이기보다는 감정이입적이다. 논쟁을 할 때 논리를 보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솜씨를 본다. 그러니 논쟁이 전쟁이 되고, 지켜보는 사람들한테는 오락처럼 여겨진다. 아울러 구술문화는 발화되는 순간 공중으로 흩어지므로 말을 바꾸고도 잡아떼면 그만이다. 정권에 따라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말을 바꾸는 것을 보면 활자문화인 신문조차도 구술적이다. 아울러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이 퍼져나가는 것 역시 구술문화의 특성이다.

    그래서 글쓰기는 위기이다.
    인터넷 글쓰기는 구술 문화에 가깝다. 오랜 사색으로 정제해낸 생각을 주옥같은 언어에 담는 독백적 글쓰기가 아니라, 반응이 오가는 상황에서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곧바로 글자로 옮겨 적는 대화적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티지털 시대에 노동은 어떻게 변화할까에 대한 얘기도 나온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넘어갈 때에 신체의 개조가 군대식 훈육을 통해 이루어졌다면,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넘어갈 때 신체의 개조는 놀이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게임에 몰두하는 젊은 세대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새 디지털 블루칼라로 제 신체를 변형시키고 있는 것이다.

    게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게임이 익숙하지 않은 나의 신체는 아직 산업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보화사회에서는 생산은 비물질화되고, 노동은 정신화된다는데 이제부터 게임이라도 해야 할까보다. 이렇게 준비되지 않아 적응하기 힘든데, 미래의 기술은 생산되는 방식이 다르다고 한다.
    21세기의 기술은 과거의 기술과 달리 '꿈꾸는 기술'이다. 꿈이 기술을 통해 현실이 되면, 기술은 예술이 되고, 상상력은 생산력이 된다. '꿈꾸는 과학 예술가'는 기술과 예술과 인문학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디지털 유리알 유희의 며인이다. 카리스마의 명령에 따라 몸을 움직이는 군대식 신체가 아니라, 스스로 발명하고 창안하는 예술적 신체이다.

    나 자신도 적응하기 쉽지 않은 판에 21세기를 살아갈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든다. 즐기면서 창안하고, 생산하는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해야 하는데 학교는 아직도 너무 전근대적이다.

    4. 에필로그

    한국사회의 비합리성과 무한경쟁에 놓인 우리의 모습을 브라질 축구와 비교해 놓은 부분은 압권이다. 좀 길지만 다 옮겨본다.

    온 국민이 축구를 놀이로 즐기는 브라질의 경우 누가 대표팀이 되든지, 누가 감독이 되든지 늘 좋은 성적을 거두리라는 일반적 기대가 있다. 반면 엘리트 선수들이 국가를 대표하여 축구를 전쟁으로 치르는 한국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여기서 4강은 일상이 아니라 신화다. 신화와 기적의 창조는 무엇보다도 '엘리트'를 뽑는 문제요, '지도자'를 따르는 문제가 된다. 이게 축구만의 일일까? 한국인들은 일반적으로 위대한 지도자와 몇몇 엘리트 기업이 자신들을 먹여살려준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읽으면 시원한데, 고민이 시작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근대성이 철철 넘치는 한국의 학교에서 자본이 미시적으로 침투해 들어와 개성을 없애는 학교에서 소수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창의성을 발현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까? 고민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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