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이 자기 가족의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았다. 특히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았다.
외할머니는 주변 사람들에게 무엇이든 주고 싶어하는 분이다.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을 위하고, 자신을 희생하지만 스스로는 그것을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외할머니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외할머니에게는 남편이 있었다. 감독의 외할아버지다. 그는 빨치산으로 활동했다. 아내와 자식을 남겨두고서.... 그런 외할아버지를 찾아 외할머니는 딸(감독의 어머니) 손을 잡고, 아이(감독의 이모)를 임신한 채로 지리산을 헤매고 다녔다. 결국 외할아버지를 만났고, 외할머니의 끈질긴 설득으로 외할아버지는 자수하였다. 이후 외할아버지는 외할머니를 원망하며 술로 지내셨다. 술이 아니면 살 수 없었다.
작은외할아버지가 있었다. 외할아버지의 동생이다. 외할아버지가 자수하여 경찰서에서 조사받을 때 외할아버지를 면회하기 위해 경찰서에 갔다가 공범으로 몰려서 고문을 받았고, 그 고문의 후유증으로 일상적인 정신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작은외할아버지가 평생 한 일은 교회에 다니면서 하루의 일들을 꼼꼼하게 기록한 일기를 쓰는 일이었다. 그리고 자해하는 일...
외할머니의 오빠도 좌익운동을 했다가 자수를 하려고 동네의 아는 경찰을 찾아갔다. 동네 사람이라서 외할머니도 알았고, 가족끼리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경찰서에 가는 길에 그 경찰의 손에 외할아버지는 죽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외할머니와 어머니, 이모 등 감독 주변의 가족들만 알고 있었다. 그 경찰의 가족들과는 지금도 연락이 가능한 상태인데 그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과연 그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일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들의 집에 가는 데서 끝난다.
외할머니의 남동생은 일본에 갔다가 형이 자수하러 가는 길에 경찰에게 죽었다는 말을 듣고 귀국을 포기하고 조총련에서 활동하여 동경 지부장까지 지냈다. 조총련 고향 방문단으로 남한에 오기도 해서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딸을 북송선에 태워 보냈다. 북한에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상태인데도. 오직 이념 하나만을 이유로... 딸은 거기서 결혼해서 지금도 살고 있다. 그런 아버지를 아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증오한다. 그 딸에게 편지 하나 보내지 않았다니까... 그 아버지도 기구하지만 그 딸은 더 기구하다. 북한에 가서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딸은 기분이 어땠을까?
잘 믿어지지 않지만 이 모두가 외할머니를 중심으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이고, 어머니가 해준 이야기이다. 이런 가족의 이야기가 특별하거나 아주 예외적인 경우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이런 가족들 말하지 않아서 그렇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럼 왜 이런 얘기를 공개적으로 하는가? 소박하게는 외할머니의 삶에 위로를 드리고 싶어서일 것이다. 역사의 한 가운데에서 정말 힘든 삶을 사신 외할머니에게 정말 고생하셨다는 말을 해드리고 싶어서일 것이다. 영화의 끝부분에는 외할머니가 병실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기 바로 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 할머니는 아니지만 정말 고생하셨고, 이제는 편히 쉬시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