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책 15] 정희진처럼 읽기: 책을 통과한 후의 나
    행간의 접속/에세이/인물 2018. 5. 31. 11:46

    책이름: 정희진처럼 읽기

    곁이름: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지은이: 정희진

    펴낸곳: 교양인

    펴낸때: 2014.10


    원래 책에 대한 책은 잘 읽지 않는다. 책에 대해서 나도 읽어봤어야지 그 사람이 한 얘기에 대해서 나의 감흥이 있을텐데, 나도 모르는 책에 대해서 실컷 얘기하면 나와의 접점이 별로 없기 때문에 별 느낌이 없다. 거기다가 지극히 주관적인 얘기까지 하면 느낄 것은 더 없다.


    그래서 이 책을 잡기 전에 망설였다. 그런데도 선택한 이유는 정희진이 썼기 때문이다. 여성학자로서 사이다 같은 강연으로 분명한 정파성을 가진 것이 그의 장점인데, 그런 것을 이 책에서 만났을 수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론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의 강연과 책에 대한 글은 약간 다르다. 강연은 그래도 흐름을 갖고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때문에 같이 몰입하고, 공감할 수 있는 반면, 책에 대한 글은 책에 대한 이해도의 차이가 있고, 거기다가 칼럼식으로 짧게 썼기 때문에 내가 같이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적었다. 거기다 지은이 본인의 입으로도 말했지만, 정말 독특하게 책을 읽는다. 남들이 안 읽는 책을 남들이 보지 않는 관점으로 읽는다. 때로는 억지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느낌도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속에서 그의 생각, 혹은 그가 읽은 책 속의 지은이의 생각 중에서는 기억할 만한 것들이 있어서 옮겨본다.


    프롤로그에 독서에 대한 생각을 써놓았다.


    독서는 내 몸 전체가 책을 통과하는 것이다. 몸이 슬픔에 '잠긴다', 기쁨에 '넘친다', 감동에 '넋을 잃는다'..... 텍스트를 통과하기 전의 내가 있고, 통과한 후의 내가 있다. 그래서 간단히 말해 독후의 감이다. 통과 전후 몸에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경우도 있고, 다치고 아프고 기절하는 경우도 있다. 내게 가장 어려운 책은 나의 경험과 겹치면서 오래도록 쓰라린 책이다. 면역력이 생기지 않는 책이 좋은 책이다. 그리고 그것이 '고전'이다.


    내가 책을 통과해서 변화가 오는데, 여러 상처들이 생기고 쓰라린 책이 좋은 책이라는 얘기다. 한마디로 나를 흔들어서 독서 이전의 나와 달라지게 하는 책이 좋은 책이라고 한다. 쉬운 책은 좋은 책이 아닐 것이다.


    프랑코 라 세클라의 '이별의 기술'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지은이는 원인과 결과를 중시하는 근대적 사고에 대해 비판한다.


    17세기 뉴턴의 과학혁명 이후 인과론은 인간의 인식론에서 과도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사회는 '원인과 대책' 식의 사고에 익숙하고 마치 모든 현상에는 원인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원인은 투명한 균질성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들의 복합이다. 원인 자체가 관찰 이전부터 이미 운동하고 있다.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하려는 노력, 이것이 흔히 말하는 근대성의 폭력이다. 


    무슨 사건이 터지면 언론에서는 원인을 분석하고 대책을 내놓는데, 정말 그게 원인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잡히지 않는 것을 잡았다고 말하는데, 세상이 그렇게 단순화하는 용기가 부럽다. 사랑과 이별의 관계에서도 이런 인식은 마찬가지다.


    상대에게 떠난 이유를 따지는 것은 전혀 효과가 없다. 사랑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실리 측면에서도 그렇고, 사실 진짜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심오하지 않다. '피해자'에게 관심도 없다. 관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쪽이 약자가 될 뿐이다. 그들은 단지 할 수 있으니까 그런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그들이 될 수 있다.


    그러면서 원인을 찾고 싶은 피해자의 심리에서는 '가해자가 사랑을 끝냈다'고 생각하지만 사랑이 그냥 끝난 것이다.  질문 자체가 틀린 것이고, 따라서 답은 없다. 피해자가 원인을 찾고 싶은 이유는 위로를 받고 싶어서다. 원인을 알면 상처를 덜 받고, 미치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러나 원인을 알면 하나의 치명적인 의문이 또 나온다. "왜 하필 나인가?" 비슷한 이야기를 지은이는 다른 책을 읽고도 한다. 이번에는 '악'에 대해서다.


    악은 의도가 없다. 의지가 있을 뿐이다. 왜 죽였니? 왜 때렸니? 왜 그랬니? 악이 답한다. "그냥 그러고 싶었는데, 마침 그럴 수 있어서, 그때 그랬을 뿐."


    학교에서 학교폭력 가해자에게 폭력의 이유를 물어보면 이유들이 말이 안 되거나 없는 경우가 많다. 발뺌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말이다. 근대적인 인식으로 이유를 물었으나 탈근대적인 현실을 절감하여 가해자를 내버려두는 것이 옳은지는 모르겠다. 쉽게 말해 악을 그냥 둘 수는 없지 않나? 지은이는 말한다. 


    악의 이유에 대한 궁금증은 피해자의 자아 존중감을 파괴하는 악의 본질이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무과닛ㅁ으로 악의 기능을 중단시키자. 그럼, 누가 악과 싸우나? 그건 악 자신이 할 일이다.


    가해자를 그냥 내버려두고, 피해자는 이유를 묻지 말라는 것이다. 악은 의도가 아니라 의지니까. 그럼 악의 의지로 누군가의 피해는 계속 일어나는데, 무관심하라고? 악이 악 자신과 싸운다고? 근대적 인식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 정의롭지 않으니까....


    지원병제에 대한 얘기가 나왔는데, 지원병제를 하면 특정한 계층, 특정한 지역의 사람들만이 지원하기 때문에 군대는 사회와 멀어지고, 그들의 노동이 은폐되고 존재는 미미해진다고 한다. 군대 문제가 사회 전체의 문제가 아닌 일부 계층의 문제로 축소되면서 사회는 더 양극화된다는 얘기인 것 같다. 징병제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이 같은 경험을 하면서 관심을 갖지만 지원병제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그러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평화는 평화로운 상태여서는 안 된다. 공동체의 문제가 공유되고 약자의 고통이 가시화, 공감, 분담되는 '시끄러운' 상황이 평화다. 지원병제는 특수한 경험을 한 사람들을 격리시키고 조용한 무관심을 조성한다. 징병제보다 무서운 것은 그것이다.


    미봉책이라는 말이 있다. 임시로 한 것, 꿰매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란다. '미'자가 '아직 미'가 아니라 '꿰매다 미'자이다. 미봉책은 꿰맨 자국이 있는 것으로 그 자체로는 불완전한 것을 말한다. 그럼 완전한 것은 꿰맨 자국이 없는 것이다. 상처 자체가 없는 것이다. 즉, 잘 꿰맨 것도 완전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삶은 미봉책의 연속이다. 상처받고 완전하지 않지만 이를 꿰매고, 또 상처받고 꿰매니까. 미봉책은 임시방편이 아니라 영원한 방도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본질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다.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내 몸이 나다. 타인을 판단할 필요가 있다면 그냥 그의 행동을 보면 된다. 행동이 그 자신이다. 이 말은 인간의 행불행은 개인의 결과라거나 부와 권력의 소유가 허무하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인간은 타인과 사물은 물론 자신도 소유할 수 없다. 가장 간단한 증거는 누구나 병들고 죽는다는 사실이다.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인간은 무엇을 소유할 수도 없고 버려질 수도 없다. 인간은 행동일 뿐 대상도 주체도 아니다. <중략>

    빈부나 선악은 행동의 목적이 아니라 행위 자체이고 우리는 그 과정에서 희로애락, 분노를 경험한다. 알아야 할 것은 분노의 본질이 아니라 분노의 위치다. 행동만이 나를 말해주고 행동만이 내가 가진 유일한 것이다.


    행동이 그 사람을 말해준다. 말로 말하지 말고, 행동으로 말하라. 그래야 믿을 수 있다. 이런 생각과 통하는 것 같다.


    책에 대해서 쓸 것들이 별로 없을 줄 알았는데, 쓰고 보니 좀 많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