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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14]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을을 위하여행간의 접속/인문 2017. 8. 18. 16:06
책이름: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지은이: 309동 1201호
펴낸곳: 은행나무
펴낸때: 2015.10
인터넷에서 지방대 시간강사의 일상을 연재한 글이 있었는데, 우리 대학의 부조리한 현실을 잔잔하면서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글이라서 흥미를 갖고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다가 한동안 못 보았는데, 책으로 출판되어서 다시 읽게 되었다.
시간강사는 비정규직으로 대학에서 시간당으로 강사료를 받는다. 논문을 쓰면서 강의를 하고 정교수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모두가 정교수가 되지는 못한다. 더군다나 지방대 출신이라면 더더욱 힘들다. 요새는 지방대에도 서울 지역 대학 출신들이 차지하느라 지방대학 출신들은 끼지도 못하는 것 같다. 그 우울한 삶의 모습들이다. 거기다가 석사 과정, 박사 과정에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 장면들에서는 대학이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지은이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보람과 힘을 얻고, 연구의 뜻을 펼치면서 대학에서 버티고 있다.
내용 중에서 인상적인 내용들을 뽑아보았다.
석사 학위 논문 준비를 하면서 이제 '쓰기'만 남은 상황에서 쓰기의 어려움을 말하는 부분이 있다.
이 반복되는 표현들을 어찌해야 할지, 어떠한 수사를 사용해야 할지, 과거 시제를 쓸지 현재 시제를 쓸지, 이 단어가 여기에 들어가도 될지, 글쓰기의 기초부터가 흔들렸다. 문단은커녕 문장 하나를 쓰는 일도 힘들었고, 이 단어가 내가 알던 단어인가, 싶을 만큼 단어 하나를 선택하는 것마저 두려웠다.
이게 논문 쓰기의 어려움이다. 한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아 진전이 되지 않는 것이다. 단어가 갖고 있는 영역이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로 그 영역인지 계속 고민하게 되고, 이 단어에 대한 반론은 없을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나도 논문을 써보지는 않았지만 글쓰기의 어려움이 잘 드러나있다.
대학이 약자들을 착취하는 모습도 고발한다. 어느 부처에 가도 학부생 조교들이 일을 하고 있고, 값싼 노동력으로 대학이 지탱되고 있다. 거기다 교원도 더이상 정규직은 뽑지 않는다. 비정규직으로 비용을 절감하면서 기업보다 앞서서 신자유주의의 가치를 실현하고 있다.
대학원 수업은 철저히 학생 중심이다. 교수는 과제를 내주고, 대학원생은 발표 준비를 해서 발표한다. 이 과정에서 교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적절한 피드백이다. 이 피드백에 따라 좋은 수업과 그렇지 않은 수업이 갈린다.
좋은 수업을 하는 교수는 수강생의 발표 수준에 맞춰 그에 따른 피드백을 해준다. 분야의 권위자와 주목할 만한 신진 연구자를 소개해주고, 학계의 최신 동향을 일러준다. 어느 부분을 수정하면 어느 학회에 투고할 만한 수준의 논문이 될 것이라는 것을 한눈에 포착해 조언한다.
그렇지 않은 수업을 하는 교수에 대한 얘기도 나온다. 자신도 장악하지 못한 주제를 발표를 시키고, 하나마나한 피드백을 준다. 돈이 정말 아깝다고 할 수 있다.
강사로서 가르치는 장면에서는 가르치는 자의 고민이 묻어있다. 대표적인 것이 강의 전에 스스로에게 한 약속이다.
1. 학생들은 내 수업만 듣는 것이 아니다. -과제 폭격은 안돼요.
2. 강의 시간과 쉬는 시간 엄수하기-집중력에는 한계가 있다.
3. 내 언어가 아닌 그들의 언어로 이야기하기-쉬운 강의를 위해서
4. 내 말을 줄이고 학생들의 말을 듣기-의미를 찾아 확장해주기 위해서
5. 모두의 이름을 기억하기-서로에 대한 작은 예의
교단에 있는 나로서도 받아들일 만한 약속들이다. 할 수 있는 것들인데 하지 않는 것도 있고,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도 있다. 나는 처음 수업을 할 때 어떤 생각을 가졌었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나와의 새로운 약속들을 다시 만들어야겠다.
아르바이트생들이 손님을 과도하게 높여서 "아메리카도 나오셨습니다."라고 문법에 맞지 않는 말을 하는 현실에 대해서도 얘기한다.
을의 공간은 사람을 무척 작아지게 만들었다. 어떤 말썽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고, 그에 따라 손님에게 최상급의 존대를 해야 했다. 그런데 나 역시 언젠가부터 빅맥 세트 나오셨습니다, 하고 있었다. 그 잘못된 문법은 오히려 더욱 자연스럽게 갑에게 가서 닿았다. 그러고 보면 카운터 위에서 갑의 소유가 된 햄버거 역시, 내가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갑과 을 사이에 끼어든 '갑의 소유물'은 어떻게든 을보다는 높은 자리를 점유했다. 그래서 빅맥 세트 나오셨습니다, 하고 외치며 갑의 소유물마저 높여주고 나는 그 아래로 자진해서 내려간다. '갑≥갑의 소유물>을'이라는 구도가 마련되는 것이다. 카운터 위의 햄버거를 높이는 문법의 오류는 역설적으로 최상급의 존대어를 만들어냈다. 강의실의 문법과 거리의 문법에는 이처럼 차이가 있다.
그러면서 저마다에 내재된 갑의 실체를 인식하고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어디서는 을이었으나 또 다른 어디서는 갑이 될 수 있다. 그것을 인식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을이라 생각하면서도 갑질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지은이는 그렇기 때문에 이를 잘 인식하고 건강한 갑으로 사유해야 함을 역설한다.
나도 '아메리카노 나오셨습니다.'라는 말이 문법에 맞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왔습니다.'로 표현해야 맞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맞고 틀리고를 지적하는 것까지만 생각했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 맥락은 생각할 수 없었다. 지은이가 이런 것까지 심도있게 통찰하는 모습에서 진정으로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간강사로서 강의 평가 항목에 학생들과 상담을 했는지에 대한 질문이 있어서 학생들과 상담을 하는데, 학생 중이 한 명이 자기도 대학원에 가서 인문학을 연구하고 싶다는 고민을 얘기한다. 그러면서 후회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이 질문에 대해 지은이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다가 결국 후회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뒤에 말을 이었다.
하지만 시간을 돌이켜 스무 살의 나에게 어느 길을 걷겠니, 하고 다시 묻는다면, 역시 죽을 만큼 고민할거야. 지금 행복하냐고 물으면, 나는 자신있게 대답할 수가 없어..... 그런데 적어도 나에게 부끄러운 선택을 하지는 않았단다. 그래서 .....
그 뒤의 말을 학생이 말한다. "그러면 버틸 수 있다는 거군요." 결국 행복? 후회? 이런 것은 언제라도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버틸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행복하면 좋겠지, 후회하지 않으면 좋겠지, 그러나 그런 것은 어떻게 보면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치열한 전쟁터와 같은 곳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버티는 것이다. 버티려면 스스로 부끄러운 선택을 하지 않는 것이다.
지은이는 대학원의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느라 '309동 1201호'라는 필명 뒤에 숨어서 책을 냈다. 자신을 밝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부모님에게도 책의 출판을 알릴 수가 없었다. 이 부분에서 마음이 짠~했다. 보통 자식이 책을 내면 부모에게도 큰 보람이 되고, 자랑이 될텐데 부모에게 알릴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읽으면서 인문학은 현실과 접점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대학도 개혁해야 함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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