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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34] 다른 길이 있다: 핵심을 찌르는 부드러움행간의 접속/에세이/인물 2016. 6. 21. 16:27
책이름: 다른 길이 있다
곁이름: 김두식 인터뷰집 쓰지만 영근 삶을 살아온 30인의 인생 이야기
지은이: 김두식
펴낸곳: 한겨레출판
펴낸때: 2013년 11월
법학자 김두식이 한겨레신문에 연재했던 인터뷰 기사를 엮어서 낸 인터뷰집이다. 신문에 연재한 인터뷰이기 때문에 심층적이기보다는 핵심적인 얘기들을 뽑아낸 느낌으로 길지 않게 인터뷰를 정리했다. 물론 실제로는 몇 시간이나 되는 인터뷰였겠지만 매체의 특성상 짧을 수밖에 없었다.
인터뷰어인 김두식이 워낙 겸손하고 모범적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인덕이 있는 사람이라서 날카로운 질문을 하지 못할 것 같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런 점이 인터뷰이들이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 것 같다. 날카로운 질문이 핵심을 찌르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감성이 핵심을 찌른다고나 할까.
30인의 면면을 보면 워낙 쟁쟁한 사람들이라서 인터뷰하기가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현재 논쟁의 중심에 있는 사람, 과거의 고난을 겪었던 사람, 정치적인 사람, 문화적인 사람 등 이 모든 사람들을 아우를 수 있을 것 같지 않은데도 어떻게든 인터뷰가 이루어지고 정리되고, 지면으로 나온 것을 보면 인터뷰어의 마음고생과 애쓴 흔적이 엿보인다.
그 중에서 인상적인 인터뷰 내용을 발췌해보았다.
정신과의사 정혜신과 심리기획자 이명수 부부를 인터뷰하면서 아이들의 교육에 대해 얘기를 하는데, 아이들 셋은 서머힐에 다닌다고 한다. 그리고 딸한테는 열여덟살부터 섹스를 하라고 하면서 남자친구를 만나고 들어오면 "오늘 했냐?" 묻고, 동거를 해봐야지 좋은 사람인지 알 수 있다면서 동거를 필수로 가르친다고 한다. 정말로 파격적인 부모들인데, 내가 우리 딸들에게도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만화가 윤태호가 『미생』을 그리면서 창작 동기를 얘기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세상 사는 게 힘든 것은 악인 때문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내적 모순때문일 때가 많거든요. 자기 한계, 내 생각의 편협함 때문에 힘든 건데, 자기를 돌아보면서 발전하는 사람들의 작은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어요.
짧은 말이지만 삶에 대한 본질을 그대로 담고 있는 말이다. 내적 모순을 인식하면서 성찰하는 것이 중요함을 얘기한다.
고전연구가 고미숙은 수유+너머에서 학문공동체를 이루었고, 이후에 이 조직이 분화되어 역시 다른 학문공동체를 이루고 있는데, 그 과정이 이상적으로 순탄하게 되었을 리는 없다. 그런 과정들 속에서 깨달은 것을 얘기한다.
다들 공동체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모였다가 엄청난 번뇌를 겪었죠. 그러면서 사람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됐고, 명분으로 만나고 명분으로 헤어지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지, 감정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어요.
나도 공부 모임을 하면서 이 사람들과 이렇게밖에 하지 못하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사람과 공부가 좋아서 모였는데, 일에 치이기만 하는 현실을 생각하면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한두번 한 것이 아니다. 특히 명분으로 만나고 명분으로 헤어진다는 말은 공동체 문제의 핵심을 그대로 찌르고 있어서 아프다.
지휘자 김대진은 한예종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면서 교육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깨달은 것을 얘기한다. 울툴불퉁 자란 아이들을 잔디깎는 기계로 깎듯이 완벽하게 깎아서 객관적인 것만 남기고 실수 없이 콩쿠르에서 상타는 것을 목표로 교육했는데, 다시 보니 그 아이만의 얼굴이 아닌 것이 되어버리고 , 흉내낼 수 없는 오리지널은 잃어버리게 된 것을 얘기한다. 튀지 않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 아닌데 말이다.
인터뷰한 인물 중에서 나와 가장 거리감이 있는 인물 중의 하나로 남성잡지 GQ의 편집장 이충걸을 들 수 있다. 남성잡지에 실린 광고에 대한 그의 생각이다.
<지큐>의 메시지는 이걸 사라는 게 아니에요. 현세에 가장 훌륭한 디자이너들의 살아 있는 작품을 보여줌으로써 안목을 높이고 변별력을 갖추라는 거예요. 잡지의 중요한 기능은 판타지예요. 눈이 즐겁고 우리 마음의 작은 한 부분을 채울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해요. <지큐>는 비싼 것만 다루지 않아요. 한국에서 도외시된 가치, 소외된 것에 대한 사랑이 더욱 커요.
남성 잡지의 광고를 보고서 나의 안목을 높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다. 정말 안목이 높아질까? 좀 다른 생각이 들기는 하는데, 잡지를 만드는 입장에서는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 하나 자기가 만든 잡지에 대한 자존심을 얘기하는 부분은 훌륭했다.
제 직업에 가장 중요한 건 저의 개인적인 자존심을 지키는 거예요. 잡지를 만들다 보면 별의별 권세들과 마주하게 돼요. 대중적으로 알려진 누군가를 섭외했는데 연예 매니지먼트가 '우리 애는 반나절만 반짝하면 중소기업 하나를 좌우할 수 있어. 뭘 해줄 건데?'하고 요구하는 일도 있어요. 그런 걸 콧등으로 날려버리자면 책이 말하려는 바, 또는 책 자체의 품질이 뛰어나야 해요. 책도 후지게 만들면서 그런 걸 웃긴다고 하면, 지나가던 개가 밟아버리겠죠. 개인적 자존심을 지키는 건 <지큐>라는 미디어를 지키는 것과 똑같아요. <지큐>는 저의 또다른 인격이거든요. 자존심을 지키는 저만의 방법은 브랜드와 관계를 맺지 않는 거예요. 친해지면 중립을 지킬 수 없고, 요청을 거절할 수 없용. 좋게 말하면 정직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편협한 건데, 그래서 어떤 배우들은 오히려 '<지큐>가 뒷거래가 없어서 인터뷰에 응하겠다'고도 해요. 문화적인 의미로서 '지큐적인'이라는 낱말, 합의가 생긴거요.
자기 잡지에 대한 자존심이 정말 대단함을 느낄 수 있는 말이다. 고유명사가 일반명사화되어 쓰일 수 있는 단계까지 잡지를 끌어올리려는 노력은 장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서 언어에 대한 애착도 드러낸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기 때문에 말을 후지게 하면 존재 자체가 남루하게 느껴져요. 사실 언어가 예전에는 권세였잖아요. 나라가 망하려면 말부터 망하거든요. 언어는 신령한 거예요. 형체가 없는 음악이 우리 마음을 만지는 것처럼, 언어도 알 수 없는 기호가 합쳐짐으로써 우리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잖아요. 붕대로 싸맸다가 칼로 베었다가. 그만큼 언어는 절대적이죠.
누구나 공감하지만 언어를 다루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인 것 같다.
그밖에 여러 사람들의 인터뷰를 했는데, 80년대 운동했던 사람들이 좀 많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한결같이 힘들고 어려웠던지 읽는 나도 가슴이 아팠다. 그렇게 살 사람들이 아니었는데, 시대가 그들을 그렇게 내몰았던 것이다.
김두식의 글들을 접하면서 편하고, 따뜻한 느낌이 좋았고, 그의 또다른 책들도 접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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