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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22] 단속사회: 자본주의 씨스템의 공고함행간의 접속/사회 2016. 4. 19. 12:29
책이름: 단속사회
지은이: 엄기호
펴낸곳: 창비
펴낸때: 2014.03
무슨 사회, 무슨 사회, 오늘의 사회를 명명하는 말들이 많은데, 엄기호는 이 사회를 단속사회라고 한다. 단속하면 지배계층이, 혹은 권력이 뭘 단속한다는 것 같은데, 그 뜻도 있지만 프롤로그에서 끊어지고, 이어진다는 말도 얘기하고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단속이란 다음과 같다. 첫번째, 단속은 낯선 것(타자)과의 만남의 단절이다. 두번째는 공적인 것과의 단속이다. 세번째, 의견을 아예 제시하지 않거나 불가피한 경우에만 최소한으로 드러내기 위해 자기검열고은 스스로를 단속하는 경향으로서의 단속이다. 네번째, 이런 결과로 나타나는 '연속의 반대'로서의 단속이다.
그리고 이러한 단속을 얘기하는 이유도 설명한다.
단속사회란 사람의 성장이 불가능한 사회다. 낯설고 모르는 것과 부딪치고 만나며 경험을 확장하고 갱신하고 통합하여 자신의 삶의 서사적 주체가 되려는 그런 성장은 불가능해졌다. 그 대신 가시적인 성과가 보이면 미친 듯이 자기를 소진해가고 그 성과가 보이지 않으면 무기력하게 널브러지는 것을 무한 반복하게 된다. 이것이 이 책에서 내가 단속을 말하려는 가장 중요한 이유다.
그러면서 이 사회의 여러 병리현상들을 구체적인 사례로 얘기를 하고 있다. 어려워질만하면 사례를 들고 나와서 풀어주니까 서서히 읽는 재미를 느끼게 만든다.
프롤로그에서 그가 언급한 사회의 모습 중에 책임에 대한 것이 있는데, 딱 들어맞는다.
이 세계에서 책임을 공유하고 나눈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다. 학교에서부터 회사, 그리고 국가에 이르기까지 문제가 벌어지면 아무도 그 문제에 대해 책임을 공동으로 지려 하지 않는다. 그 대신 누구에게 그 책무가 있는지를 따져 묻는다. 이렇게 될수록 사람들은 문제가 벌어질 경우 '독박'을 쓰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간파하게 된다. 따라서 책임을 공유하며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 대신 책임을 회피하고 남에게 미루는 기술마나 늘어난다. 개인들이 사악해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책무를 중심에 두는 씨스템이 그렇게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씨스템 아래에서는 책임을 홀로 떠맡게 된 사람의 고통을 같이 나누지 않고 이를 외면해야만 자기가 살아갈 수 있다.
관료사회의 특징인데, 책임을 분명하게 짓고, 잘못된 경우 책임을 묻는 것. 문제는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책임을 질만한 일을 하지 않고.... 사회는 정체되고..... 그리고 이미 무슨 일이 벌어지면 함께 해결하려 하지 않고, 누구 하나를 희생시키려고 하고.... 공동체가 아니라 야만의 모습이다.
현대의 여행에 대해서도 얘기하는데, 생각해 볼만한 얘기들이다.
현대사회에서 여행의 함은 '발견'의 함도 아니고 찍고 도는 '확인'의 함으로 바뀌었다. 여행을 가면 우리는 잠시도 쉴 새 없이 돌아다닌다. 본전을 뽑아야 하기 때문이다. 어디서 무엇을 느꼈고 새로운 것을 깨닫게 디었는지보다 최대한 많이 돌아다니고, 많이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봤다는 것이 생각했다는 것을 압도한다. <중략> 이런 여행에는 배움이 없다. 배운 것이 없으니 여행을 다녀와서도 할 말이 없다. 새로운 것을 경험했으면 들려줄 이야기가 무궁무진하게 많아야 하는데 이미 알던 것만 확인해왔으니 여행의 끝에 다다를수록 이야기는 점점 더 빈곤해지는 역설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이 여행을 다녀온 '동물'들은 다녀왔다는 사실 자체에 '만족'한다. 행복이 아니라 만족이 삶의 목적이 되었으니 그럴 법도 하다.
마지막 말, 만족하지만 행복하지는 않다. 만족을 행복이라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나도 여행을 이렇게 다닌 것은 아닌가 싶다. 패키지 여행이 아니라 자유여행이라서 느끼는 것이 많다고 생각했지만 따지고 보면 확인하고, 만족한 것. 딱 거기까지인 것 같다.
그 다음 소통에 대해서, 나눔에 대해서도 얘기한다.
흔히 '나눔의 시간'이라 하면 참가자들이 돌아가면서 제 이야기를 한마디씩 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때 나누어지는 것은 무엇일까? 각자의 일상? 아니면 각자의 경험? 그렇다고 한다면 도대체 일상과 경험을 나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일방적으로 한번 말해지고 마는 것, 그것을 경험의 나눔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떤 모임에서 다 같이 모여서 자신의 사례를 나눌 때 우리는 돌아가면서 자기 얘기를 하면 나눔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시간이 지루하거나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면서 그야말로 형식적으로 흘렸던 적이 있을 것이다. 그 시간이 그럴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제 얘기한다. 거기에는 말하는 사람이 타자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해야 하는데, 그저 자신의 사적인 투덜거림으로만 갖혀 있었기 때문이다. 똑같은 사적인 이야기라도 그 문제가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의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을 끄집어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공적인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경험의 전승이 이루어지고, 이를 통해 경험이 갱신되고 확장되어 공동체는 지속 가능한 공간이 된다고 말한다. 그냥 혼자서 말하는 '전달'이 아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의미있게 되는 것이다.
학교가 노동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르쳐왔다고 말한다.
학교에서는 일상적으로 '노동'이 징벌로 사용되어 왔다. 지각하거나 숙제를 제때 못 냈을 때, 혹은 담배를 피우는 등 규정을 어겼을 때 벌로 청소를 시킨다. 더 심하면 이번 사건처럼 봉사노동을 하게 한다. 화장실 같이 '더러운' 장소를 청소하는 것은 누가 봐도 '징벌'로 보인다. <중략> 청소 같은 노동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벌 받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다. 그 결과 우리는 학교 다닐 때부터 노동은 될 수 있는 한 피해야 하는 것이라고 훈련받게 된다.
바로 벌 청소. 벌로 노동을 하는 것이다. 노동이 신성한 것이 아니라 벌로서 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노동은 피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학교는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이 유흥주점형 모델에서 노동자에게 요구되는 단 하나의 덕목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능력이다. 나아가 타인에게 자신의 고통을 전가하는 능력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학교는 지금 좌파와 우파 모두가 개탄하는 것처럼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공간'이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의 재생산을 위해 자시늬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내는 '잘 굴러가고 있는 공간'인지도 모른다. 왕따와 학교폭력이 벌어질 때마다 학생들이, 아니 학교 구성원 전체가 훈련하는 것이 바로 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능력' 아닌가. 내 친구의 고통에 동참하는 순간 나도 왕따가 되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스스로 왕따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제까지 친했던 친구라도 배신할 수 있어야 한다. 왕따가 된 친구의 고통을 외면하기 위해 '왕따는 나쁘지만 당한 친구도 원인 제공했다'라며 피해자에게서 원인을 찾으며 자신의 침묵과 외면을 합리화해야 한다. 왕따와 학교폭력, 이것은 학교가 제 구실을 못해 벌어지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학교가 이 시대의 자본주의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제공하는 구실을 수행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학교가 제 구실을 못해 벌어지는 '부작용'이 아니라 오히려 씨스템에 의해 만들어지는 '주작용'일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무서운 얘기다. 자본주의에서 학교는 이럴수밖에 없는 것인가. 다른 식으로 될 수는 없는 것인가.... 이럴수밖에 없다면 학교가 없어지는 것이 나은 것이 아닌가. 탈학교사회처럼.
결국 글쓴이가 이런 문제들을 얘기하면서 지향하는 것은 타자를 통해 자기를 보고, 경험을 갱신하여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이다. 말이 어려워서 그렇지 주변이 사람들을 인정하고 함께 잘 살자는 얘기인데, 자본주의의 씨스템이 공고하니 어찌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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