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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86] 고래: 100% 이야기의 힘행간의 접속/문학 2012. 12. 23. 22:25
대화나 묘사는 별로 없이 대부분이 서술로 이루어진 독특한 소설이다. 그야말로 이야기 하나로만 승부한다고 할 수 있다. 마치 변사나 이야기꾼이 우리 앞에서 말하는 투로 서술을 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와의 거리가 매우 가깝고, 장편소설이므로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 인물의 여러 이야기가 들어있으면서 그 이야기들이 여러 장르적 성격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기담이나 재담, 영화적인 이야기, 사랑 이야기 등 복합장르 같은 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3부 구성보다는 노파와 금복, 춘희로 이어지는 여인 3대의 이야기로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해서 복잡하기는 하지만 중심에는 늘 이 세명이 있다고 할 것이다.
1. 노파
노파는 평대의 국밥집을 운영하던 여인인데, 얼굴이 너무 못생겨서 결혼 하루 만에 쫓겨났다. 그러다 대갓집의 하인으로 일하다가 그 집의 외아들 반편이의 양물에 반해서 붙어먹다가 들켜서 죽기 직전까지 맞고 또 쫓겨난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어 복수를 위해 반편이를 몰래 꼬셔서 계곡에 빠뜨려 죽인다. 반편이가 죽은 후 그의 딸을 낳는다. 딸의 눈이 반편이를 닮았다는 이유로 구박을 하다가 부지깽이로 찔러 애꾸로 만들고 벌치기에게 팔아넘긴다. 평대에 국밥집을 차려 아끼고 아껴 많은 돈을 벌었으나 20년 뒤에 찾아온 딸 애꾸의 복수로 뇌진탕을 당한다. 벌어놓은 돈을 국밥집 지붕 위에 숨겨 놓은 채로 떠돌이 생활을 한다. 벌어놓은 돈을 금복이 차지한 것을 알게 되어 결정적인 때마다 나타나 금복과 주변인물들에게 복수한다. 생선장수의 차가 눈길에서 사고가 날 때, 극장에 불이 날 때, 춘휘가 출옥할 때 등과 같은 때에 홀연힌 나타난다.
2. 금복
산동네에서 아버지와 살다가 생선장수를 쫓아 부두로 나오게 된다. 생선장수와 건어물 장사를 돈을 벌게 되고, 덩치가 큰 걱정을 만나 그와 살게 된다. 걱정이 부상을 당해 일을 못하게 되자 생계를 위해 칼자국의 도움을 받게 되고, 칼자국의 제안에 따라 셋이 살게 된다. 금복과 칼자국의 관계를 어느 정도 알게 된 걱정이 자살하자 칼자국이 걱정을 죽인 줄 알고 칼자국을 작살로 찔러 죽인다. 칼자국의 집을 나와 거지로 떠돌다 쌍둥이 자매네 마굿간에서 춘희를 낳고 쌍둥이 자매의 주선으로 평대로 와서 노파가 하던 국밥집을 운영한다. 칼자국과 함께 다니며 맛을 들인 커피를 좋아해서 국밥집에서 커피를 팔게 되고, 결국 다방으로 전업하게 된다. 그 즈음 많은 비로 인해 지붕이 무너지자 노파가 숨겨놓은 돈을 발견하게 되고 문과 함께 벽돌공장을 세우고, 다방을 새로 지으면서 쌍둥이 자매에게 다방을 맡긴다. 소식을 듣고 찾아온 생선장수의 차를 개조하여 운수업을 할 수 있게 하고, 극장업에도 손을 댄다. 극장을 열고 개장식 때 호르몬 분비 이상으로 남성화되어 남성밈을 선언하고 남성으로 살아간다. 어린 창부 수련을 구해주고 사랑하게 되지만, 정보기관에 끌려갔다 온 후 극장을 맡겼던 어릴 적 동네 친구 약장수에게 수련과 재산을 모두 빼앗기게 되고, 술에 취해 살다가 극장 화재로 죽는다.
3. 춘희
금복의 딸로 덩치가 크다. 말을 할 줄 모르지만 섬세한 감성으로 세상의 것들을 느끼면서 주로 자연이나 동물과 소통한다. 쌍둥이 자매가 데려온 서커스 코끼리와 소통하며 고립된 삶을 살다가 코끼리가 죽자 벽돌공장에서 문과 함께 지내면서 벽돌 만드는 기술을 익힌다. 극장 방화범으로 몰려서 수감 생활을 하고, 출옥 후 갈 데가 없자 벽돌 공장 주변에서 수렵 채집 활동으로 살아가면서 벽돌을 만든다. 수감 전 공장을 찾아왔던 트럭 기사의 아들(사내)의 도움으로 벽돌을 팔 수 있게 되고, 그와 사랑하게 된다. 그의 아이를 낳고 키우지만 아이는 폭설에 갖힌 채 열병으로 죽는다. 아이의 죽음 후 수년간 벽돌을 만들다 죽는다.
전체 인물이 아닌 중심이 되는 인물 몇몇을 설명하면 대충의 틀거리가 보이는데 이 이야기는 빈틈이 많다. 결국 줄거리는 요약할 수 없다. 서술자가 이미 우리에게 요약해서 이야기를 했으니 어떻게 더 요약한단 말인가? 그만큼 이야기가 이 소설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읽으면서 인상적인 것은 자연과 소통하는 춘희의 모습은 이상적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우리가 간직해야 하는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순처럼 여리고 무구한 춘희의 감성은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춘희는 자신의 상처를 어떤 뒤틀린 증오나 교묘한 복수심으로 바꿔내는 술책을 알지 못했다. 고통은 그저 고통일 뿐 다른 어떤 것으로 환치되지 않았다. 상처는 지워지지 않았고 그녀의 가슴 한가운데엔 고통이 화석처럼 굳게 자리를 잡았다. 그것이 춘희의 방식이었다.
고통과 상처를 온전히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미련해 보이지만 때로는 그런 것도 우리 삶에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죽는다. 등장인물이 좀 복잡해서 메모하면서 읽었는데, 정리하다보니까 다 죽는다. 그것도 제 명에 사는 사람 없고, 다 사고나 살인, 방화 등으로 죽는다. 삶이 그런 것이라고 하기에는 이건 좀 지나치지만 극적인 요소를 위해서 그런 것 같다. 이 사실을 인식하고부터는 읽기가 좀 무서웠다.
마지막에 작가 인터뷰도 있는데, 평범한 듯 하면서도 비범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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