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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85] 핑퐁: 핑퐁은 대화고, 세계는 지금 듀스포인트야행간의 접속/문학 2012. 12. 17. 17:16
박민규의 소설 속에서 위트와 재미, 가벼움 속에서도 현실에 대해서 잠깐이라도 생각하게 하는 요소들을 발견하게 되면서 그의 소설을 또 잡게 되었다. 제목이 '핑퐁'인데 탁구다. 탁구 치는 애기이다. 그런데 그냥 탁구 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생존을 걸고서 탁구를 치는 것이다. 아... 이렇게 되면 무거워진다. 구기 스포츠의 공 중에서 가장 가벼운 공으로 온 인류의 생존을 걸어야 하는 이 아이러니.... 작가의 소재 선택은 탁월하다.
1. 줄거리
나는 '못'이라고 불리는 중학생이다. 왕따고 만날 맞는다. 저항하지 못하고, 피해 받으면서 가해자 치수와 그 일당이 잠깐씩 베푸는 친절에 감격하여 자발적으로 맞고, 자발적으로 상납하고, 자발적으로 심부름한다. 그러다 비슷한 처지의 '모아이'라는 친구를 만나고 둘이서 우연히 벌판에서 탁구를 친다. 그러다 모아이의 제안에 따라 시내의 탁구 숍에서 라켓을 구하고, 숍의 주인인 세크라탱의 지도로 탁구를 배운다.
그런 일상이 지속되다가 어느날 거대한 혜성만한 탁구공이 지구와 부딪쳐 지구는 멸망할 위기에 처하고, 세크라탱의 안내를 받아 인류를 구하기 위한 마지막 시합에 출전한다. 새크라탱 일가족은 탁구계의 간섭자로 이 경기를 진행하기 위해 지구에 온 외계인(?)이었다. 시합의 상대는 비둘기와 쥐인데, 이들은 먹이를 먹기 위해서는 탁구를 치도록 길들여진 로봇보다도 더 정교한 상대였다.
시합은 11점 7세트 4선승제인데, 랠리를 수도 없이 많이 해서 5점을 내는데 하루가 더 걸리는 경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쥐와 비둘기는 어떠한 공이 넘어와도 정석적으로 받도록 훈련받아서 아무런 공격, 아무런 변칙 플레이를 하지 않은 채로 버티는 것이었고, 점수가 나는 경우는 못과 모아이, 대리자 산악가와 말콜X가 실수를 해서 실점하는 경우인 것이다. 그렇게 세트 스코어 0:3까지 몰린다. 그러다 못의 끈질긴 인내력으로 무아의 경지에서 랠리를 이끌어 비둘기와 쥐가 과로로 죽고 말아서 경기는 못과 모아이의 승리로 결정되었다.
이제 이들에게 인류를 새롭게 인스톨할지, 아니면 언인스톨하고 그대로 유지할 지 결정만이 남는다. 인스톨하면 못과 모아이는 남은 생애를 그냥 지금처럼 살되 나머지 다른 모든 인류와 문명은 멸망하는 것이다. 언인스톨은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고.... 최후의 결정에서 두 사람은 언인스톨하기로 결정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2. 황당하지만 치밀한 우주적 상상력
박민규의 우주적 상상력이 발휘되고 있다. 인류가 멸명하는 순간에 대한 생각들이 황당하게 느껴지지만 소설적 구성에서는 나름 여러 가지 장치를 해놓고 있다. 새크라탱이 비둘기와 탁구해서 이긴 적이 없다는 말은 이후에 못과 모아이가 비둘기와 시합하는 것을 염두에 둔 말이었고, 왕따와 같이 피해받으면서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들이 역설적으로 인류를 구한다는 것은 소수자 혹은 우리가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이들도 결국에는 언젠가는 필요할 수도 있다는 종 다양성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강아지똥의 우주적 버전?
3. 핑퐁의 은유 1: 대화
왜 하필 탁구로 인류의 생존을 결정지을지 생각했을 때 작가는 몇 가지 생각을 보여주고 있다. 아까 얘기한 것처럼 가장 가벼운 공으로 인류의 생존이라는 무거운 결정을 짊어지게 하는 아이러니가 있고, 또하는 대화와 소통이다.
핑 퐁. 핑 퐁. 세계가 다시 움직인 것은 우리의 랠리가 시작되면서였다. 처음엔 말없이, 그러다 한참 동작에 익숙해지자 어느 순간부턴가 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은 기묘한 체험이었다. 공을 받는 순간 말이 나오고, 공이 네트를 넘는 순간 말은 끝이 난다. 한 소절 한 소절 정확한 템포로, 그래서 마치 노래를 주고 받는 기분이었다. 긴 말을 하기 위해선 또다시 한 박자를 기다려야 했다. 신체의 동작에 따라 뱉는 것인데다, 상대의 동의 없이는 절로 말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공평한 느낌이었다. 아, 이것이 대화구나.
4. 핑퐁의 은유 2: 듀스 포인트-작가의 현실 인식
핑퐁의 은유는 또 있는데, 작가의 현실 인식이 들어가 있다. 작가는 현실을 듀스 포인트 상태로 보고 있는 것이다. 선과 악, 혹은 이편과 저편, 혹은 너와 나 등등... 대립되는 대상들이 서로의 영역, 혹은 서로의 점수를 쌓아가면서 현실을 이룬다는 인식이다. 새크라땡과 인류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못이 인류를 용서할 수 없다고 하자 새크라탱이 말한다.
얘야, 세계는 언제나 듀스포인트란다. 이 세계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나는 줄곧 그것을 지켜봤단다. 그리고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에게 탁구를 가르쳤어. 어느 쪽이든 이 지루한 시합의 결과를 이끌기 위해서였지. 하지만 아직도 결판은 나지 않았딴다. 이 세계는 그래서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곳이야. 누군가 사십만의 유태인을 학살하면 또 누군가가 멸종위기에 처한 혹등고래를 보살피는 거야. 누군가는 페놀이 함유된 폐수를 방류하는데, 또 누군가는 일정 헥타르 이상의 자연림을 보존하는 거지. 이를 테면 11:10의 듀스포인트에서 11:11, 그리고 11:12가 되나보다 하는 순간 다시 12:12로 균형을 이뤄버리는 거야. 그건 그야말로 지루한 관전이었다. 지금 이 세계의 포인트는 어떤 상탠지 아니? 1738345792629921:1738345792629920. 어김없는 듀스포인트야.
인류는 현재 듀스포인트에 있다.
5. 전체적인 느낌
전반부와 중반부는 도대체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싶었다. 의미 있는 부분보다 의미 없는 부분이 더 많아 보였고, 실제로 그렇다고 나는 생각한다. 많이 지루했으니까 그런데 결말로 갈수록 승부가 나고, 결판이 나면서 힘이 붙어서 재미는 있었다. 그러나 앞부분을 좀더 배려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앞부분이 너무 황당하게 가는 바람에 균형이 잘 안 맞는 느낌이다. 아무튼 끝가지 읽기를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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