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에 관한 책을 읽은 적은 별로 없다. 더군다나 공공미술이라니... 얼핏 전문서적처럼 보이는데, 전문서적 맞다. 그런데도 읽은 것은 인디고 서원의 아이들도 읽었다는데, 그 애들이 뭔가 얻은 것이 있는 것 같아서 나도 한 번 얻어 보려고 읽은 것이다. 그 얻은 것들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1. 왜 공공미술인가?
새로운 미술이 필요한 이유는 삶을 죽이는 도시와 공간, 사회의 문제 때문이고, 아울러 예술의 상품화와 시장 일변도의 역할 때문이다. 즉, 도시체제는 양적 성장을 지상과제로 하고, 무형적이고 영혼적인 가치를 저버린 채 경제적 효율성만을 운영원리로 잘라냈다. 또한 예술이 현실로부터 미와 행복을 탈출시키는 역할을 함으로써 현실의 진실을 가리는 모순된 기능을 펼치며, 결국 사람들은 행복을 '불행의 끝없는 순환 속에서 만나는 한 순간의 위안적인 아름다움'으로 착각한다. 사람들은 삶에 대한 반응을 속으로 삼키고 행복은 실제 삶이 아니라 미학적 영역에서 찾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예술이 삶의 기대를 저버리고 체제의 욕망을 담는 역할만 펼치다 보니 그 아름다움은 세상살이와 연관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그르치기까지 한다.
'행복을 불행 끝에 오는 위안적 아름다움으로 착각한다'는 말은 정말 충격적인 말이다.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이 세상은 불행으로 싸여있고, 행복은 어쩌다가 삶을 이어가게 해주는 위안적인 역할만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착각이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행복은 어디에 있으며, 예술은 어떠해야 하는가 궁금해진다.
2. 무엇이 공공미술인가?
체제가 욕망하는 이야기를 하는 모뉴멘트의 시대에는 권력자의 위치에서 역사를 명상하는 것이다. 각종 동상과 기념물 등이 모뉴멘트이다. 장소 속의 미술은 공공 장소에 미술을 설치하는 것이다. 문제는 장소가 갖는 맥락은 무시한 채 미술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장소로서의 미술은 공공장소를 어떻게 볼 것인지 생각하고, 그 공간에 부합하는 미술을 어떻게 구성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후에공익 속의 미술과 새 장르 공공미술은 공공성에 질문을 던진다.
공공미술은 예술적 비전과 사회적 가치의 결합이어야 하고, 공간적 상황과 예술적 속성의 결합이고, 예술 자체가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 창의적으로 봉사해야 한다. 이러한 요구를 실제적으로 담는 개념이 바로 '사용미학'이다.
3. 어디에 공공미술이 있는가?
공공미술의 성격은 텍스트보다는 콘텍스트, 텍스추어에 가깝다. 텍스트를 중시하는 사람에게 사랑의 진실은 "사랑해"라는 말이다. 그러나 사랑을 잘 하는 사람은 말만으로 사랑이 통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상대가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마음과 행동을 말과 함께 보낸다. 텍스트의 진실을 우기기보다 주고받고 교감하는 사랑의 콘텍스트를 만들어 보내고, 사랑의 질감(texture)를 전한다.
멀리 보는 풍경(landscape), 높이 보는 풍경(skyscape), 어둡게 보는 야경(nightscape)은 머리와 눈으로 기획한 볼거리들이다. 이들은 몸과 삶의 현장을 배제한다. 지치고 남루한 삶의 현장과 몸이 개입하면 체제의 구조적 아름다움이 훼손되기 때문에 이들 풍경은 체제의 시점에서 보여주고 싶은 것만을 담는다. 공공미술의 아름다움은 이런 높이와 거리를 없애고 가능한 한 가까이 다가간다. 동등한 높이와 친밀한 거리는 몸으로 가득 채워진 또 다른 풍경의 아름다움을 붙잡는다.
공공미술은 삶의 현장에서 우리 가까이 있다는 얘기인데, 사람들의 삶을 배제하는 관광엽서 같은 풍경에 감탄해왔던 나의 모습이 살짝 흠칫해진다. 높은 데 올라가서 풍경 보는 것, 야경보는 것을 좋아했었는데, 그 풍경 속에는 사람들의 삶이 배제된다는 것을 새롭게 느꼈다.
4. 어떻게 공공미술이 되는가?
체제와 미디어는 예술가와 삶, 예술과 일상의 연관을 지워버린다.위대한 예술은 고흐나 이중섭처럼 광기가 있어야 하고, 예술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삶과 예술을 이렇게 떼어놓는 이유는 첫째, 예술가들이 세상에 대해 가졌던 성찰과 비판, 꿈의 눈을 세상과 떼어놓기 위해서이고, 둘째, 예술가들이 보고 절망한 세상의 억압과 부자유를 부인하기 위해서이다. 셋째, 재미를 위해서이다. 우리가 봐야 하는 것은 죽음으로 꺾인 천부적 재능이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처절한 의지로 삶과 예술을 연장하는 데서 오는 아름다움이다. 또한 그들의 불행 역시 세상과 어울리지 못한 데서 온 것이 아니라, 자유를 억압하고 죽은 삶을 강요하는 세상을 남들보다 먼저 보았던 것이다.
예술은 죽어가는 것, 버려진 것과 잊혀져 가는 것을 기억하고 되살리는 일이다. 삶은 소외되지 않고 기억될 수 있어야 제대로 사는 것이다. 생명을, 생태를 그 본연으로 살아 있게 하는 것, 그래서 예술은 자연의 생태처럼 살아 있는 것들을 경탄해 왔다. 예술과 일상의 관계는 죽음을 살리는 삶에서 피어난다.
5. 누가 공공미술을 만드는가? / 6. 언제 공공미술은 살아 있는가?
미술가, 사용자, 공공정책
내용을 요약하고 보니까 내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느꼈다. 맥락없이 괜찮은 말들만 뽑아낸 것 같다. 아무튼 이 책은 공공미술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예술의 역할에 대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삶과 유리된 채 체제 속에서 효율성과 자본의 논리에 휩싸인 예술이 삶과 결합하면서 '벌이'가 아닌 '살림'으로 와야 한다는 것이다. 미술의 경우에는 공공미술이 그 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적, 문화적 소양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 예술을, 특히 미술을 다시 보게 해주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