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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 18] 맨 얼굴의 사랑: 욕망으로 외로움을 가릴 수는 없어
    행간의 접속/문학 2025. 6. 24. 13:49

    책이름: 맨 얼굴의 사랑
    지은이: 정아은
    펴낸곳: 민음사
    펴낸때: 2017. 7.

    책 뒷표지를 보면  작가를 ‘도시 세태의 기록자’라고 했는데, 딱 들어맞는다. 내가 읽었던 그의 작품들(모던 하트, 잠실동 사람들)을 보면 욕망을 숨기지 못한 도시인들의 민낯을 날카롭게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작품도 욕망에 대한 보고서가 될 것 같아서 읽게 되었다. 더군다나 성형외과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하니까 욕망의 최첨단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무명의 방송작가인 이서경이 성형외과와 관련된 작품을 쓰기 위해 성형외과 의사에게 접근하고, 그와 동거하고 사랑하지만 그의 마음은 얻지 못하고, 매니저 시절 자신이 맡았던 한류스타 강재희와 육체적으로 관계를 맺으면서 욕망을 해소하다가 결국 파멸에 이르는 이야기이다.

    이서경의 내면은 부, 과시, 섹스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는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자신을 포장하는 것들이다. 반면에 성형외과 의사 조성환은 욕망을 거의 드러내지 않으면서 이성적으로, 냉철하게 때로는 다정하게 이서경을 대한다. 이서경 입장에서는 속을 알 수 없다. 조성환의 반대편에는 강재희가 있는데, 그는 머리는 텅 비어 있고, 생각이나 마음을 숨길 줄도 모르고, 다른 사람들한테 이용당하기 쉽고, 오직 섹스만을 생각하는 욕망의 덩어리이다. 이 둘 사이에서 이서경은 자신의 외로움을 채우려고 하지만 외로움은 채워지지 않는다.

    소설의 후반부에 조성환이 동성애자라고 이서경이 생각하는 장면이 나오면서 이야기가 흘러가는데, 작가는 명확하게 동성애자라고 표현하고 있지 않아서 믿어도 되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동성애자로 생각한다면 조성환이 술에 취해 경찰서에서 연락이 온 사건이라든가, 이서경과 키스나 섹스를 하지 않은 이유들이 어느 정도는 납득이 되기는 한다.

    성형외과가 돌아가는 시스템을 묘사하는 부분이나 성형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외모에 대한 욕망이 거대하다는 생각도 했다. 상담실장들, 중국인 고객을 모시는 브로커들, 성형외과 의사들..... 욕망을 미끼로 치밀하게 돌아가는 시스템이 참 정교하다고도 생각했다.

    읽으면서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들도 좀 있었는데, 이서경이 자신에게 아이가 있다고 조성환에게 얘기하자 조성환이 그 아이를 데려오자고 하는데, 무슨 이유로 그렇게 얘기했는지가 궁금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니까 키우겠다는 것인지, 이서경하고는 섹스를 하지 않으니까 결혼해도 애를 낳지 않을테니 아이를 데려오자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아이가 갓난 아이도 아니고 거의 초등학생이 되는 정도의 나이인데 이미 안정된 가정에서 지내고 있는 아이를 정말 데려올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말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읽으면서 인상적인 부분이 두 군데 있었는데, 하나는 음악에 대한 묘사 부분이다.

    자리에 않아 메뉴판을 건네받는 순간 넓은 레스토랑에 쩌렁쩌렁 올리던 테너의 목소리가 뚝 그치고 처연한 바이올린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감고 곡의 도입부를 음미했다. 생상스 바이올린 협주곡 3번 1악장. 악기의 순서, 선율 하나하나까지 빠짐없이 외울 수 있는 곡, 지하가 밤낮으로 틀어 놓아 내게도 신체의 일부처럼 되어 버린 곡이었다. 오랜만에 듣는 서늘한 바이올린 소리, 활을 긋기 직전에 흘러나오는 악기의 숨소리. 고조에 고조를 거듭하며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클라이맥스에 이르려는 순간, 악기가 힘들게 오른 길에서 다시 한번 도약하기 위해 잠깐 쉬었다가는 찰나에 나오는 깊은 숨소리는 지하가 함께 듣던 내 손목을 으스러져라 쥘 정도로 끔찍하게 좋아하는 대목이었다. 실은 바이올린 소리보다 활을 굿기 직전에 나는 숨소리를 듣기 위해 이 곡을 듣는 거야. 속삭이던 음성. 이마를 맞대고 종교의식을 치르듯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의 영혼을 받아들였던 시간. 순간 숨이 막힐 것 같은 그리움이 밀려왔다.

     

    전체 줄거리와는 직접 관련은 없지만 음악을 통해서 정서가 움직이는 상황을 굉장히 잘 묘사하고 있다고 느꼈다. 음악은 형체가 없고, 흐르는 것인데, 사라지는 것인데 이것을 문자로 이렇게 포착해서 그려내고 있는 것이 멋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장면은 이서경이 걸그룹을 하던 시절의 쓰레기 같은 기획사 사장이 찾아오자 두려움을 느끼는 장면인데, 여기서 잊었다고 생각했던 과거라는 시간의 의미를 말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쏜살같이 과거의 한 시점으로 날아간 의식은 좀처럼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했고, 두려움이라는 순도 높은 재료로 생성된 눈물이 찔끔찔끔 흘러나와 턱과 목을 간질였다. 과거라는 말은 실상이 없다는 것을, 지나간 일을 칭하는 그 단어는 그저 말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나는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인생에 있었던 그 어떤 일도 과거가 아니며, 모든 일은 그저 잠깐 잊혔다 한순간 맹렬하게 현재로 되살아나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과거가 지나갔으니 다 끝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생각을 뒤집는 상황, 이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정은아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 세태보다는 서경의 욕망의 비중이 커서 약간 실망이었다. 성형외과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인간군상들의 욕망을 골고루 다루었으면 하는 기대가 있었는데, 좀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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