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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44] 한국형 시나리오 쓰기: 시나리오 쓰기의 모든 것행간의 접속/문화/예술/스포츠 2024. 11. 13. 13:47
책이름: 한국형 시나리오 쓰기
지은이: 심산
펴낸곳: 해냄
펴낸때: 2004.10.
시나리오를 내가 쓸 일은 없지만 영상을 만들 것을 전제로 하는 이야기는 무엇이 다른지 궁금해서 읽게 되었다. 고전적인 시나리오 작법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지만 시나리오를 쓰는 소설가로서, 그리고 시나리오 쓰는 법을 강의하는 강사로서 실전에서 깨달은 지식을 엮은 책이다. 읽으면서 새롭게 알게 된 내용을 중심으로 뽑아 보았다.
1. 시나리오에 대한 정의
첫째, 시나리오는 하나의 완결된 작품이다.
잘라내어도 좋은 신이 있다면 그것은 완결된 시나리오가 아니다. 편집에서 잘려나갈 대사라면 처음부터 쓰지 않았어야 한다. 거둬들이지 못할 씨앗은 아예 심어두지 않는 것이 좋다. 운을 뗀 이야기는 반드시 완결지어야 하고 해결 못할 갈등이라면 건드리지도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해서 대사 하나, 동작 하나, 신 하나 버릴 것 없이 모두 다 전체와 조응하는 시나리오가 나왔을 때 우리는 그것을 완결성 있는 작품이라고 말한다.너무 당연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이런 이야기를 할까 싶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런 완결성을 갖추지 못한 시나리오가 있다는 이야기이고, 특히 시나리오 쓰기를 배우는 사람들에게서 특히 많이 발견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다.
둘째, 시나리오는 설득의 도구다.
시나리오(와 그것의 결과로 만들어진 영화)가 설득해야 할 최종적인 대상은 언제나 관객이다. 우리는 관객을 위해 영화를 만든다. 하지만 극장에서 관객과 만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무수한 사람을 설득해서 제작이 진행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첫번째 설득대상? 감독일 수도 있고 제작자일 수도 있다. 감독과 의기투합하여 시나리오를 완성한 다음 제작자를 찾아 나설 수도 있고, 제작자의 기획아이템을 시나리오로 만든 다음 감독을 찾을 수도 있다. 감독과 제작자만 설득하면 그것을 끝인가? 어림도 없다. 투자자를 설득해야 하고 배우를 설득해야 한다.그러면서 배우들을 설득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배우들이 허우대만 멀쩡하고, 머리통은 비어있다는 생각은 선입견이라고 하면서 배우들은 신중하게 작품을 고르고 캐릭터를 내면화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고 말한다. 그런 진정한 예술가들을 설득시키기 위한 시나리오는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셋째, 시나리오는 견적서다.
제작비 산출의 근거가 되는 것은 시나리오다. 유능한 제작자라면 시나리오를 읽어보면서 신마다 어느 정도의 제작비가 소요딜지를 어렵지 않게 도출해 낼 수 있다. 그것이 5억짜리 소품인지 50억짜리 대작인지는 시나리오 단계에서 결정된다. 적은 제작비가 소요될수록 좋은 영화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액수는 상관없다. 그 시나리오가 정확히 어느 정도의 제작비가 소요될지를 분명히 계산해 낼 수 있는 투명한 견적서의 역할을 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한 편의 영화가 제작되기까지에는 스크린 뒤에 숨어 있는 무수한 스태프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 스태프들에게 '내가 무얼 해야 되는지'를 인식시켜 주는 설계도면의 역할을 하는 것도 시나리오다. 이를 위해서는 장면과 상황에 대한 정확한 묘사가 필수적이다. 단순히 '값비싼 외제차'라고 표기해 놓으면 현장에서 혼란이 생긴다. 제작부에서 대여해 놓아야 할 차가 BMW인지 페라리인지 람보르기니인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장의 모든 스태프가 시나리오를 기준으로 일한다. 촬영부나 조명두는 말할 것도 없고 세트제작자, 헤어드레서, 분장담당, 의상담당 등이 모두 눈에 불을 켜고 들여다보는 것이 시나리오다.이렇게 되면 시나리오를 쓰는 입장에서는 엄청나게 부담스러울 것 같다. 자신의 한 마디, 한 문장으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들고, 거기에다 억 단위 돈도 들어가는 상황이 벌어지니까말이다.
2. 시나리오 작가의 경쟁률
이렇게 정의된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이 자신의 시나리오로 영화를 만들려면 얼마만한 경쟁률을 뚫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대략 매년 공모전에 출품되는 시나리오는 3천 편 정도이다. 1년에 영화 제작 편수는 60편. 60/3000이므로 대략 2%인데, 60편 중에서 기성 작가 50편 이상, 신진 작가 10편이 안 된다. 그럼 10/3000이므로 0.3%정도이다. 그런데 3000편도 다시 따져야 한다. 3000편은 완성된 시나리오의 숫자인데, 시나리오를 쓰겠다고 달려드는 사람의 1/5만이 작품을 완성한다. 그러면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은 5배를 곱해야 하므로 15,000명 정도라고 볼 수 있다. 그 중에서 10명 정도만이 영화로 제작되는 시나리오 작가라고 할 수 있으므로 10/15,000이므로 0.06%이다. 15,000명 중에서 10등을 할 수 있을까? 쉽지 않다.
3. 전공 영화 베껴쓰기
전공 영화는 자신이 그 시나리오를 하도 많이 베껴써서 영화를 보면 시나리오를 떠올릴 수 있고, 눈 감고도 시나리오를 떠올릴 수 있고, 다른 시나리오를 쓸 때 참고가 되는 바이블 같은 영화를 말한다.
나는 우선 영화를 전체적으로 본다. 이때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특정한 사건들이 몇 분 만에 일어나는지를 일일이 체크하면서 끝까지 본다. 그래서 영화 전체의 내용을 파악하고 그것을 몇 개의 시퀀스로 나누어본다. 그리고는 다시 처음부터 시퀀스별로 나누어서 보기 시작한다. 한 시퀀스를 파악했으면 이번에는 다시 그 시퀀스의 처음으로 돌아가 신 별로 뜯어본다. 간단한 상황묘사와 대사를 쓰는 것은 기본이다. 그런 식으로 끝까지 다 보고 나면 이제 내가 작성한 메모(이것은 메모밖에 안 된다)를 음미한다.
메모를 기초로 하여 각 신을 회상해 보면서 구체적인 지문들을 쓰기 시작한다. 이 과정이 끝나면 다시 영화를 보며 내가 놓친 것은 무엇인지를 일일이 체크한다(일 대조의 과정에서 엄청나게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일단 베껴 쓰기의 초고가 완성되면 다시 영화로 돌아간다. 이제는 누가 봐도 완벽한 베껴 쓰기의 단계로 들어갈 때다. 목표는 분명하다. "이 영화를 보지 못한 사람도 내가 베껴 쓴 시나리오를 읽다 보면 실제의 장면들을 눈앞에 그려볼 수 있게 될 때까지!"4. 시나리오 작가의 썰
시나리오 작가는 영업도 잘 해야 한다. 시나리오를 읽는 것도 시간을 들이는 것인데, 읽고나서 시간 낭비했다고 할 수도 있으므로 미리 시나리오에 대해서 말로 설명을 해야 한다.
자신이 쓴 시나리오가 어떤 내용인지를 5분 안에 설명하는 것. 그것이 피칭(peaching)이다. 누구에게? 물론 그 시나리오를 구입하거나 채택할 수도 있을 만한 제작자나 감독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이것은 일종의 세일즈 기술이다. 당신은 자신이 만든 상품(시나리오)을 소비자(제작자나 감독)에게 팔아야 한다. 그럴려면 무엇을 갖추어야 하는가? 상품의 핵심적 내용에 대한 정확한 소개, 소비자가 그것을 구입했을 때 얻게 되는 구체적 이익에 대한 비전의 제시, 그리고 순식간에 상대방의 혼을 쏙 빼어놓을 만한 멋진 화술.
그런데 이게 쉽지 않다. 그렇지만 해야 한다. 시나리오는 글로 쓰지만 글로 쓴 시나리오를 읽게 하려면 말을 잘 해야 한다. 결국 시나리오 작가는 글도 잘 쓰고 말도 잘 해야 한다.
5. 플롯 중심과 캐릭터 중심
시나리오를 쓸 때 줄거리를 머릿속에 그리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거기에도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플롯이 중심인가, 캐릭터가 중심인가 결정해야 한다.
당신은 이제 시나리오를 쓰려 한다. 그렇다면 지금 결정해야 한다. 플롯을 먼저 세울 것인가 캐릭터를 먼저 잡을 것인가? 연쇄살인범이 나오는데 세 번째 살인이 이루어진 후 강력계 형사들이 바짝 추적한다. 그래서 연쇄살인범은 네 번째 살인계획을 수정해 강력계 형사의 가족을 파고들기 시작한다....... 이런 식으로 사유한다면 당신은 플롯 중심으로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 플롯을 가장 잘 부합하는 캐릭터를 창조해 내야만 한다. 일찍이 20대에 영화에 뜻을 뒀으나 40대가 되도록 데뷔도 못한 감독지망생이 있다. 이 녀석이 대박감독이 된 친구를 찾아가 꼬장을 부린다...... 이런 식으로 사유한다면 당신은 이미 캐릭터 중심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 캐릭터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플롯을 창조해 내야 한다.
그러면서 할리우드는 플롯 중심, 한국 영화는 캐릭터 중심이 많다고 한다. 이유는 제작비 때문에. 그리고 플롯 중심이라고 해도 캐릭터가 탄탄하지 못하면 그것도 안 된다고 한다. 결국 시나리오의 성패는 캐릭터가 좌우한다는 것.
6. 드라마 속 주인공, 그리고 장애물시나리오는 결국 드라마인데, 드라마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주인공이 나오고 갈등이 나온다.
그렇다면 드라마란 도대체 무엇인가? 극작술과 시나리오 작법을 다룬 모든 책은 저마다 자기 나름대로 정의를 내놓고 있다. 그것 중 내가 알고 있는 가장 단순명쾌한 정의는 프랭크 대니얼의 것이다. 그는 드라마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짧막한 문장으로 압축했다.
"누군가가 어떤 일을 하려고 대단히 노력하는데 그것을 성취하기는 매우 어렵다(Somebody wants something badly and is having difficulty getting it)."
시정잡배의 언어로 옮겨 쓰면 더 쉽고 간단하다. '누가 뭘 하려고 졸라리 애쓴다.' 놀랍지 않은가? 이게 드라마의 전부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이 짤막한 명제만 제대로 소화해 내면 드라마의 기본은 제대로 세워진 것이다. 하지만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 간명한 정의 속엔 엄청난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마련이다. 누가 뭘 할려고 졸라리 애쓴다. 이 문장 안에는 주인고, 그가 하고자 하는 일, 그리고 갈등이나 장애물이 모두 녹아들어 있다.그리고 그 주인공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하는 것, 그 바탕에는 욕망이 있다. 그래서 주인공은 욕망이 있어야 한다.
누가 뭘 할려고 졸라리 애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인공'과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이다. 주인공은 능동적일수록, 하고자 하는 일은 구체적일수록 표현하기가 수월하다는 것은 이미 말했다. 여기까지가 '누가 뭘 할려고'에 해당한다. 이젠 나머지, 즉 '졸라리 애쓴다'에 대해서 떠들 차례다. 그는 왜 졸라리 애쓰는가? 간단하다. 하고자 하는 일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어렵게 만드는 것을 일단 '장애물'이라고 부르자.
이러면서 장애물과 부딪치는 갈등을 이야기하고, 내면 속의 갈등도 이야기하고, 내면을 말로 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영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도 이야기한다.
7. 시간과의 싸움
시나리오를 쓰다 보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서 길어지는데 소설이라면 장편소설로 가거나 대하소설로 가면서 분량에 제한이 없지만 시나리오는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을 고려하면 시간 안에 상영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100분 싸움의 승패는 장면 전환에서 갈린다.
여기 100신으로 이루어진 시나리오가 있다. 그렇다면 이 시나리오에서 장면 전환(transition)은 99번 일어난다. 이때 압축과 비약의 장면 전환이 몇 번이나 일어났는가에 따라 시나리오의 스크린 타임이 묘사하고 있는 리얼 타임의 총량이 결정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기법은 리얼 타임의 양뿐만 아니라 스크린 타미의 질도 결정한다. 어떤 뜻에서 관객은 압축과 비약이 효과있게 사용한 세련된 스토리텔링을 즐기기 위해 극장을 찾는다고도 말할 수 있다. 만약 너무 수차적이어서 충분히 다음 신을 예견할 수 있는 장면 전환들로만 이루어진 영화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최악의 영화다.장면 전환을 즐기기 위해 영화를 본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가만히 생각하면 장면을 전환하면서 생략을 하고 압축을 하면 관객은 상상으로 그 공간을 채우는 재미, 그러면서 이야기를 완성하는 재미. 그런 것들이 영화 속에는 있었던 것 같다.
장면 수를 줄이는 것도 중요하다. 장면과 장면 사이를 생략과 비약의 원칙에 따라 멋지게 건너뛰는 것은 더 중요하다. 더 나아가 하나으이 장면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서 다시 시간을 세분하여 꼭 보여줄 것만 보여주려는 시도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장면 전환과 신 내 점프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을 때, 우리에게 주어진 100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시간과의 싸움에서 주도권을 틀어쥐고 관객의 시선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려면 반드시 통달해야만 되는 기법이 장면 전환과 신 내 점프다.
신 내 점프라고 하니 낯설어 보이는데, 간단하다. 한 장면 안에 여러 신이 있고, 여러 신 중에서 몇 신을 뛰어넘어 편집해도 이야기는 전달이 되고 오히려 스피디하고 간결하고 감각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광고나 뮤직비디오에서 많이 쓰는 것이니까 말이 낯설지 눈으로 보면 낯설지 않다.
8. 설명하지 않고 설명하기
시나리오를 쓰다보면 설명해야 할 것들이 많다. 그런데 그걸 다 대사로 넣거나 나레이션으로 넣으면 관객들은 지루해 죽는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설명을 하되 설명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럼 그건 또 어떻게 하나? 갈등과 유머를 섞어서 넣거나 퍼즐 맞추기처럼 파편만 보여주고, 알아서 정보를 찾아서 맞추게 하는 방법도 있다.
일단 반드시 필요한 정보의 총량을 100이라고 하자. 그 100을 한꺼번에 쏟아붓는 대신 몇 개로 분산시켜 여기저기 숨겨놓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할 때 장면마다 관객에게 던져지는 것은 정보의 전체가 아니라 그 파편들이다. 관객은 이 파편들을 스스로 끌어 모은 다음 나름대로 추리과정을 통하여 하나의 완성된 그림을 그리게 된다. 이를테면 일종의 퍼즐맞추기다. 정보의 총량이 일시에 홍수처럼 쏟아부어지면 관객은 지레 질려서 고개를 돌려버린다. 대신 숨은그림찾기나 퍼즐맞추기처럼 주어지면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완성해 나가며 영화 속으로 몰입하게 된다.
9. 아이러니의 어원아이러니는 고대 그리스의 희곡에 등장하는 인물에서 나온 말이다. 건장한 체구의 허풍쟁이 사기꾼인 알라존과 왜소하고 굼떠 보이지만 실은 교활하고 약삭빠른 에이런이 있다. 겉으로 봐서는 알라존이 에이런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해 보이지만 연극이 진행되면서 에이런이 결국엔 승리의 미소를 짓게 된다. 그래서 알라존이 음모를 꾸미려고 하면 관객들은 또 당하겠구나 하면서 웃을 준비를 하고, 에이런이 그 음모에 속아주는 척 할 때 웃음은 극대화된다.
이 코미디는 얼마나 인기를 끌었는지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는 관용어를 만들었다. 겉을 보고 예상되는 것과는 달리 엉뚱한 결과가 나오리라는 것을 미리 느끼게 될 때 그리스인들은 "에이런스럽다"고 말했다. 알라존이 더 큰 허풍과 더 교묘한 사기를 치려들 때 그리스인들은 그 상황을 보고 "에이런스럽다"고 말했다. 현대의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아이러니컬하다." 그렇다. 오늘날에도 널리 통용되고 있는 미학용어 혹은 극작법의 하나인 '아이러니(irony)'라는 단어는 바로 '에이런'이라는 캐릭터에서 연유된 것이다.
10. 관객의 정서를 흔들어라
플롯과 스토리, 캐릭터 다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기억에 남도록 하는 것, 감동을 주는 것, 그것이 정서이다.
정보는 최소화하고 정서는 최대화하라. 이것이 인간의 정서를 다루는 예술가들이 꿈에도 잊지 말아야 할 금과옥조다. 하지만 최소한의 정보는 그야말로 뼈대다. 그 뼈대가 온전히 서 있지 못하다면 그 이상의 치장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일단 뼈대가 바로 섰으면 이제 그 위에 살을 입히고 피를 돌게 하다라. 그들로 하여금 웃고 울고 갈망하고 좌절하며 기뻐하고 쓸쓸해하다가 결국엔 인간 실존의 깊은 곳까지 파고들도록 하라. 관객을 움직이는 것은 정보다 아니라 정서다. 플롯과 스토리라인만으로 이루어진 시나리오는 앙상한 해골에 불과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스토리라인을 '어떻게 전달하는가'의 문제다. 그리고 스토리 및 캐릭터를 관객과 연결시켜 주는 가장 중요한 무기는 바로 정서적인 장면들이다.
11. 대사
대사가 시나리오의 대부분의 분량을 차지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나올 줄 알았는데, 아니다. 대사는 시나리오의 대부분을 차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문이 더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이게 무슨 얘기인가 먼저 대사와 지문의 관계부터 보자.
대사와 지문에 대한 나의 태도는 이렇다. "대사가 지문보다 많으면 그것은 시나리오라고 할 수 없다." 그런 시나리오가 있으면 그것은 차라리 희곡이나 텔레비전 드라마 대본에 가까운 것이다. 자연스럽게 영상을 떠올릴 수 있는 간략한 지문을 구사하면서 대사는 그것보다 더 적어야 한다고? 그렇다! 어떤 장면은 열 줄의 지문과 한 줄의 대사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것이 시나리오다. 하지만 한 줄의 지문과 열 줄의 대사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것은 시나리오가 아니다. 시나리오는 우리가 극장에서 보고 듣는 시청각적 현상의 전체를 들어내야 한다. 대사는 그중 극히 일부를 차지할 뿐이다. 시나리오의 대사가 극히 압축적이어야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대사가 압축적이어야 한다고 하는데 양도 적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럼 어떻게 대사를 만들어야 할까? 내가 대사를 만든다고 하면 줄거리에 맞게 설명을 하면서 나갈 것 같은데, 그 과정에서 잘못된 대사들이 나온다. 미리 들려주는 대사, 영어회화식 대사, 설명하는 대사 등을 꼽는다. 미리 들려주는 대사는 영화를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것들을 해설자처럼 알려주는 대사이다. 영어회화식 대사는 뻔한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진 대사이다. 설명하는 대사는 말 그대로이다. 그밖에 추상적인 대사와 문어체 대사도 있고, 고백형 대사도 있다. 그렇다면 가장 좋은 대사는 정서적이니 울림을 담은 대사이다.
대사가 극한까지 진화한 형태 곧 최고의 대사는 '정서가 담긴 대사'다. 도대체 정서가 담긴 대사란 어떤 것일까? 설명해 내기가 정말 어렵다. 어떤 뜻에서 '감정이 실린 대사'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그 이상을 표현해 낸다. 가령 <정사>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사들을 상기해 보자. "당신은 왜 나를 좋아하죠? 난 나이도 많고 아이도 있는데." 멋진 대사다. 이 대사는 감정이 실린 대사임에는 틀리없다. 그러면 어떤 정서까지 담고 있는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이 책이 술술 막힘없이 읽히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글쓴이의 문체가 거침이 없다. 내 머릿속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서 자신이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갈 수밖에 없도록 자연스럽게 유도하니 그냥 무장해제하고 따라가면 목적지에 도달해 있다. 문체의 힘이다. 또 하나는 예시가 설명과 잘 맞아떨어진다. 그러니 이해가 잘 될 수밖에 없고, 예시로 든 영화의 80%는 내가 본 영화들이다. 그래서 재미있게 읽을 수밖에 없다.
내용이 참 좋은데 젊은 사람들은 예시로 나온 영화를 보지 못한 사람도 있을테니 최신 영화로 업그레이드해서 다시 집필하면 안 될까? 아니, 시나리오를 쓰겠다고 하는 사람 정도면 다 봤어야 하는 영화라면 나도 할 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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