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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46] 당분간 인간: 인간들 참 건조하다행간의 접속/문학 2021. 8. 20. 21:36
책이름: 당분간 인간
지은이: 서유미
펴낸곳: 창비
펴낸때: 2012.10.
『땀 흘리는 소설』 중에서 「저건 인간도 아니다」라는 작품을 인상깊게 읽어서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은 무엇이 있을까 찾아보니 그 작품이 수록된 단편소설집을 발견하여 읽게 되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탐구하는 것이 문학, 특히 소설의 본질적인 질문이기는 하지만 이 작가의 이 작품집에서는 특별히 경제적인 상황과 맞물려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드러내는 작품이 많이 있는 것 같았다.
「스노우 맨」은 폭설로 출근하지 못하는 직장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주인공은 폭설로 집 밖으로 나설 수 없고, 길도 막혀서 회사를 쉰다. 다음 날고 쉰다. 그런데, 그 다음 날에는 왜 안 오냐고 호통이 떨어진다. 눈이 많이 왔고, 치울 수도 없는데 어떻게 가냐고 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 왔다고 한다. 그 눈을 뚫고, 길을 내고...... 결국 주인공도 길가에 버려진 삽을 들고 눈을 파헤치며 회사로 간다. 차로 20분이면 갈 거리지만 눈을 헤치며 가면 4시간도 넘게 걸린다. 가는 도중에 상사와 연락을 해보니 다른 사람들은 주인공이 출근하지 않았던 첫날과 둘째날에 부지런히 길을 뚫어놓고 셋째날에 회사에 출근을 한 것이었다. 이런 모습에서 회사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모습이 그려지고, 결정적으로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기로 유명한 유대리도 출근을 하지 않았다는데, 주인공이 눈을 파헤치는 가운데에서 쓰러져 죽은 유대리를 발견하고 소설은 끝난다.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해야 하지만 일하다 죽는 직장인의 소외를 잘 표현하고 있다.
「삽의 이력」은 도시의 동쪽에 거주하고 일하는 주인공이 반복되는 업무에서 벗어나고자 서쪽의 회사로 파견을 요청하여 일하는 이야기이다. 서쪽의 회사에서는 새로운 미래 도시 건설의 기초를 다지다고 하면서 주인공에게 공장 앞 마당을 파라고 한다. 아무 맥락없이 파고서 퇴근했다가 출근하니 어제 판 구덩이는 다시 메워져 있고, 다시 판다. 이런 작업을 몇 주 동안 계속 하다가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묻지만 회사는 그냥 하라고만 한다. 그러다 퇴근 후 술을 마시고 공장에 다시 오니 누군가가 자신이 팠던 구덩이를 메우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주인공은 그를 죽이고 파묻는다. 이후 그의 구덩이는 메워지지 않고, 공장의 웬만한 곳들은 다 파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그 구덩이를 스스로 메우면서 소설은 끝난다. 의미없이 반복된 업무를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는데, 구덩이를 메우던 윤을 죽이는 장면에서 자신의 고민과 업무의 무의미성을 발견하면서 허무감에서 그를 죽인 것 같다.
「세 개의 시선」은 세 명의 등장인물은 남편의 불임으로 정자가 필요한 유부녀 직장인 경, 승진과 돈이 필요한 직장인 진, 오디션 프로그램의 성공이 필요한 현의 이야기이다. 경은 진으로부터 소개받은 현에게 관심을 보이며 그의 정자를 얻으려 하고, 현은 부담스럽지만 진에게 꾼 돈을 갚기 위해서 경의 호의를 거부하지 못한다. 진은 전세를 올려달라는 집주인의 요구에 현에게 꾼 돈을 갚으라고 압박하지만 능력이 없는 현은 갚지 못한다. 결국 진은 경에게 현이 경제적인 도움이 필요하다고 귀띔을 해주고, 그 돈이 돌고 돌아 자신에게 오도록 한다. 그리고 경은 임신을 하고 회사를 퇴사하고, 진은 승진하는 데에서 소설은 끝난다. 세 사람의 얽히는 과정이 재미있고, 서로를 이용하는 모습이 섬뜩하기도 하다.
읽으면서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없거나 K, 윤, 진, 경 등 익명화되어 있어서 소설이 건조한 느낌이 들고, 어느 누구에게 공감을 할 수가 없어서 거리를 두고 읽게 만든다. 그리고 약간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가상의 세계를 풍자한 것 같은 느낌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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