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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18] 나의 운명 사용 설명서: 자신의 운명을 알면 삶이 달라져행간의 접속/인문 2015. 12. 10. 22:55
책이름: 나의 운명 사용 설명서
지은이: 고미숙
펴낸곳: 북드라망
펴낸때: 2013.12
고미숙의 명심보감 3부작 중 제2권이다. 이 책의 주된 내용은 사주명리학에 대한 것이다. '사주'는 우리가 사주팔자 본다고 할 때의 그것이고, '명리학'은 운명의 이치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주팔자에 대한 지식이나 생각들이 사실은 편견에 가득 차 있음을, 사주팔자는 그렇게 고정적인 것이 아님을 역설하고 있다. 그래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나름 익숙한 것을 새롭게 읽을 수 있었다.
1. 사주와 음양 오행설
사주란 네 개의 간지(생년/월/일/시)이다. 팔자는 사주가 천간과 지지로 나뉘어지므로 팔자가 되는 것이다. 그럼 이런 사주팔자는 어떤 원리를 바탕에 깔고 있나? 그것은 인간이 이 세상에 태아날 때 우주의 기운을 받는다고 하는 생각에 의한 것이다. 우주의 기운은 해와 달, 그리고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목성, 화성, 토성, 금성, 수성의 기운들이다. 해와 달은 음양, 목화토금수는 오행, 그래서 음양오행설이 그 바탕이다.
음양오행설의 기본성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팽창을 하며 물질과 에너지가 흩어지는 과정이 양의 과정이며, 물질과 에너지를 모으는 과정이 음의 과정이다. 여기 팽창의 과정에서 처음에 한 방향으로 뚫고 나오는 힘이 목이며, 목을 통해 한 방향으로 뚫고 나온 힘이 사방팔방으로 무질서하게 흩어지는 과정이 화이다. 또한 수축의 과정에서 한없이 흩어져 더 이상 흩어질 수 없는 상태까지 분열된 화를 거두어 수렴시키는 과정이 금이며, 금을 통해 수렴되면서 외부만 굳어진 것을 그 속까지 단단하게 응고시켜 한 점으로 통일시키는 과정이 수이다. 팽창하는 목과 화, 수축하는 금과 수는 제각기 자기의 운동 상태를 고수하려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이런 목화금수를 부드럽게 달래 주며 중재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토이다.
일반적인 상식과 달라서 낯설다. 가령 수는 물인데, 물이 단단하게 응고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 그러하다. 그런데 자꾸 접하다보면 익숙해지지 않을까 싶다. 현상이 아니라 성격이라고 하니까.... 이를 바탕으로 십간을 표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갑을
병정
무기
경신
임계
목
화
토
금
수
이 중 앞에 있는 갑, 병, 무, 경, 임은 양의 성격이고, 을, 정, 기, 신, 계는 음의 성격을 가진다.
2. 용신, 정해진 것은 없어.
사주를 보면 이 오행이 골고루 다 있는 경우는 드물고, 한 두개 부족하거나, 한 두개만으로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의 운명이 그것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이를 보완하는 방법이 있다. 내부적으로 보완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지장간이다. 지장간은 지지에 숨어 있는 천간이다. 즉, 지장간에서 오행을 따져서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사주를 보완하는 것을 용신이라고 한다. 나는 여기서 보완한다고 했는데, 사실은 순환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결국 사주명리학은 변화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보통 사주명리학을 말하면 숙명론이 아니냐는 반론이 만만치 않다. 인생을 결정된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다. 하지만 숙명론은 정해진 운명이 있다, 없다가 아니라, 운명에 대한 해석을 전적으로 외부에 맡기는 것을 뜻한다. 몸이 아플 때 의사나 묘방만을 찾으면 그것이 곧 숙명론이다. 왜 아플까? 그 인과를 찾기 시작하고 그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풀어 가게 되면 그건 숙명론이 아니라 운명에 대한 비전탐구가 된다. 그런데 비전탐구를 하려면 나의 몸과 마음, 그리고 그것이 작용하는 원리와 좌표를 알아야 한다. 한마디로 나를 찾아가는 여행을 시작해야 한다. 사주팔자란 이 여행을 할 수 있도록 네비게이션 역할을 하는 것뿐이다.
3. 십신
사주명리학은 자신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 즉 사회적 관계망에 대해서도 알려준다. 그 관계에 대해 갖는 열가지 힘의 양상이 십신이다.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비겁
비견
나(일간)와 오행이 같고 음양이 같은 것
친구, 선후배, 동업자, 형제자매, 부하직원
겁재
나(일간)와 오행이 같고 음양이 다른 것
주체적인 힘, 자존심, 자신감
식상
식신
내가(일간) 생하고 음양이 같은 것
여자: 자식 / 남자: 처가식구
상관
내가(일간) 생하고 음양이 다른 것
의식주, 언어, 시작, 변화, 계획, 표현, 예술
재성
편재
내가(일간) 극하고 음양이 같은 것
여자: 아버지 / 남자: 여자, 아버지
정재
내가(일간) 극하고 음양이 다른 것
재물, 결과물, 마무리, 일(욕심)
관성
편관
나(일간)를 극하고 음양이 같은 것
여자: 남자 / 남자: 자식
정관
나(일간)를 극하고 음양이 다른 것
명예, 직장, 자유, 조직, 사회적 관계, 시련, 불편함
인성
편인
나(일간)를 생하고 음양이 같은 것
여자: 어머니 / 남자: 어머니
정인
나(일간)를 생하고 음양이 다른 것
공부, 문서, 부동산, 도와주는 세력, 의존성
글쓴이는 쉽게 풀어서 쓴 것 같은데, 어휘들이 낯설어서 그런지 잘 들어오지는 않는다. 대략적으로는 감이 오는 것 같은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그래도 사회적인 관계를 나타낸다는 것을 생각하고 기억하려고 한다.
그 다음에 사주명리학에 대한 내용들은 별로 나오지 않고, 우리 일상 생활 속의 여러 모습을 사주명리학의 관점에서 풀어보는 얘기들이 나온다. 흥미롭게 읽었지만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나는 오히려 사주명리학에 대한 얘기를 좀더 자세히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4. 사주명리학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괜찮은 부분들
읽다보면 사주명리학 자체를 얘기하지 않고, 사주명리학적인 생각을 이끌어내기 위해 현대사회의 여러 병리현상들, 우리 삶의 모습을 진단하는 부분들이 있는데, 그런 부분들에서 새로운 시각과 신선함,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얘기가 바로 그런 것이라는 생각 등을 느끼는 부분도 있었다. 그런 부분도 뽑아보았다.
운동의 가치와 명분이 자신의 몸, 그리고 삶의 현장과 동떨어져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 간극을 메우려고 더더욱 헌신적으로 활동을 조직하지만 심리적으로는 조증과 울증이 반복된다. 아울러 내적 충만감이나 존중감 또한 점점 더 무너져 간다. 그러다 보니 자꾸만 아프다. 활동과 일상, 명분과 현장, 이 사이에 대해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 것일까? 이 간극을 통찰하지 못하면 진보든 혁명이든 별무소용이다. 그때의 진보나 혁명은 오직 물질적 분배, 제도적 서비스, 시스템의 문제로 환원되어 버린다. 아니, 그 이전에 단체와 조직은 진화하는데, 거기에 속한 개인들이 불행해진다면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럼에도 운동단체들은 이런 문제들과 직접 대면하려 하지 않는다. 노동운동이건 여성운동이건 실무적 투쟁이 중심이지 인생과 자연, 몸과 우주에 대한 공부를 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마치 그것은 노동자나 여성들, 기타 소수자들과는 무관한 것인 양, 또 그런 것을 하면 마치 정치적 의식이 퇴행하기라도 하는 듯이.
조직은 진화하는데, 그 속의 개인은 불행해진다는 말이 뼈 아프게 다가온다. 조직 활동의 당위성은 이해하는데, 마음이 따라주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 일을 해야 하지만 내가 행복해질 것 같지 않은 일들.... 글쓴이는 몸과 우주를 공부하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지만 그것을 이행할 수 있는 조직은 얼마나 될까? 비슷한 얘기가 또 나온다.
사회를 바꾸는 활동과 소수자를 위한 운동은 아주 종종 헌신과 희생으로 귀결되곤 한다. 혁명을 위해 자신을 내팽개치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혁명인가? 내가 나를 구원하지 못하는 혁명이 대체 누구를 구할 수 있단 말인가? 공적으로 표방하는 명분과 내밀한 욕망 사이의 이중 플레이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아무리 혁명을 외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의 욕망은 곧 사회적 인과의 결과물이다. 나의 질병은 곧 시대적 징후의 산물이다. 나의 욕망, 나의 질병을 탐구하고 해명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타자들에게 그것을 전파하고 순환시킬 수 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그것뿐이다. 한꺼번에 다수의 삶을 혁명적으로 바꾸고 싶다는 발상은 그 자체로 형용모순이다.
그러면서 자신에 대한 존중감,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 볼 수 있는 관점을 가지면 어떤 자본이나 권력도 무너뜨릴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자신감은 '운명애'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한다. 운명을 사랑하는 힘. 이것만 보면 허황되 보이는데, 이 부분부터 사주명리학과의 관련성이 생기는 것이다.
학교-집-병원-직장-교회가 현대인들의 동선이다. 여기에 백화점이나 커피숍 등이 덧붙여진다. 그야말로 홈파인 회로다. 이 회로에 갇히면 누구나 답답하다. 하지만 벗어날 엄두를 못 내는 건 이것이 '정상적인' 삶이라는 확인 때문이다. 이 궤도를 이탈하면 비정상이 된다. 정상/비정상의 경계가 강력해지면서 행복과 불행의 기준을 대치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행복한가?'라고 묻지 않고 '정상인가?'라고 질문한다. 정상성이라는 척도는 모든 욕망을 균질화한다. 무의식에 깃든 카오스적인 충동들을 쌈박하게 정리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유효한 도구다. 국가와 자본이 정상/비정상의 구획을 유포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
우리의 삶을 이렇게 정확하게 나타낸 표현을 이전에는 본 적이 없다. 행복을 말하지 않고, 정상과 비정상을 말하면서 행복한 줄 알고.... 생각할수록 답답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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