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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59] 국가란 무엇인가: 자유와 행복을 위한 국가를 위하여행간의 접속/사회 2016. 9. 29. 23:01
책이름: 국가란 무엇인가
지은이: 유시민
펴낸곳: 돌베개
펴낸때: 2011.04
보수정권이 역사를 거꾸로 돌리고 있는 상황에서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인가, 도대체 국가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는 책이다. 전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쓰되 과거 철학자들은 같은 질문에 어떤 대답을 했는지도 분석하고 정리해서 얘기하기 때문에 생각의 폭을 넓힐 수 있다.
1. 국가란 무엇인가?
인간은 집단을 이루면서 살아가면서 자기보존의 욕구로 만인이 만인에 대해 경쟁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불안한 자연상태를 겪게 되는데, 이를 벗어나기 위해 국가를 창조하였다고 홉스는 생각했다. 그러면서 모든 사람이 자신의 권리를 똑같이 포기하고 자신이 다른 사라메게 허용하는 만큼의 자유를 자신도 누리는 데 만족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법의 권리를 공동의 권력에게 양도하기로 사회적 계약을 맺었다.
홉스에게는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넣고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전제군주제가 가장 이상적인 국가형태였다. 그의 논리는 명확하다. 국가를 탄생시킨 신약의 목적은 사회 내부의 무질서와 범죄, 외부 침략의 위협에서 사람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중략> 따라서 주권자 또는 통치권자가 이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는 한, 그는 신약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셈이다. 누구도 여기에 대항해서는 안 된다. 국가의 목적 수행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각자 추구하는 다른 가치나 소망, 욕구, 삶의 목표는 모두 부차적이거나 국가의 목적 수행에 방해가 된다. 신민은 정부 형태를 변경할 수 없다. 국가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무슨 일을 하든 통치권자는 처벌받지 않는다.
이러한 국가관을 국가주의 국가관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키아벨리는 군주는 이래야 한다는 항목을 제시하였다.
현명한 군주는 강력한 군대를 보유해야 한다. 군주는 꼭 덕을 갖출 필요는 없지만 반드시 덕을 갖춘 것처럼 보여야 한다. 신민의 결속과 충성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잔인하다는 평을 듣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군주는 자신을 두려운 존재로 만들되, 신민의 사랑을 받지는 못하더라도 미움을 사는 일은 피해야 한다. 자비롭고 신의가 있고 인간적이고 정직하고 경건한 것처럼 보여야 좋겠지만, 언제든 필요하면 정반대로 행동할 태세를 갖추고 실제로 그렇게 해야 한다. 신의를 지키는 것이 불리할 때는 약속을 지킬 수 없으며 지켜서도 안 된다. 군주는 미움을 받을 일은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고 인기를 얻는 일은 자신이 친히 해야 한다.
현대에 군주는 홉스와 마키아벨리가 말한 것처럼 통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그런 통치자는 그렇게 멀리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자신을 두려워하게 해야 한다는 것과 약속을 지키는 것이 불리하면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는 특히 그러하다.
그러나 다른 견해도 있다. 자유를 갈구하는 인간의 본능을 담은 정치제도를 철학적으로 뒷받침한 사람들이 존 로크, 애덤 스미스, 존 스튜처트 밀이다. 로크는 법에 따르는 통치, 스미스는 국가의 간섭 배제, 밀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는 기본권을 얘기했다. 이들에 의해서 자유주의 국가론이 만들어졌다.
자유주의 철학자들도 사회계약론을 전적으로 거부한 것은 아니다. 국가가 사회계약에 의해서 범죄와 무질서, 안전을 지키는 임무를 지녔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주권자는 군주가 아니라 개인을 중요시했다. 국가는 개인을 위해서 복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권력이 자기의 임무를 수행할 때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과 절대로 넘어서지 말아야 할 경계를 설정했다.
애덤 스미스의 자유주의 국가론을 종합하면 국가는 공공재를 서비스하는 공급자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인 치안서비스와 국방 서비스는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하며 개별적으로 사용료를 징수하기 어렵다. 그래서 국민은 능력에 따라 세금을 내고 국가는 모든 국민에게 보편적인 국방과 치안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스미스가 인정한 국가의 의무는 공공재를 공급하는 것 단 한가지뿐이다.
또한 장 자크 루소는 정치색이 농후한 자유주의 국가론을 폈는데,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빼앗을 경우 사회계약을파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정부가 법치주의를 위반하면 인민에게 정부를 무너뜨릴 권리가 있음을 분명히 했다. 그러면서 정부과 국가를 분리해서 생각했다. 정부는 국가와 주권자를 중개하는 단체일 뿐이라고는 것이다. 중개를 잘못하면 바꿔야 한다는 것. 오늘날에는 상식에 속하는 생각이지만 군주제가 일반적인 루소의 시대에는 대단히 혁명적인 생각이었을 것 같다.
밀은 로크와 루소의 생각을 받아들이면서 정당한 권력이 법률을 통해서도 개인의 자유를 구속하고 제한할 수 없는 자유의 영역이 있다고 보았다.
국가는 개인의 자유를 어떤 경우에 어느 정도까지 정당하게 구속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밀은 아주 간단하고 명료한 단 하나의 원리를 천명했다. 인간사회에서 누구든, 개인이든 집단이든, 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자기보호를 위해 필요할 때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위해서라면, 국가가 그 사람의 의지에 반해서 권력을 사용하는 것도 정당하다. 이 단 하나의 경우 말고는 문명사회에서 구성원의 자유를 침해하는 그 어떤 권력행사도 정당화할 수 없다. 이것이 밀의 대답이었다.
이러한 밀의 사상은 우리나라의 헌법에도 들어있다. 그러나 그 헌법조항이 실제로 실현되고 있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게 우리가 극복해야 할 점이다.
또한 밀은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도 중요하다고 했는데, 이 자유가 침해당해서 침묵을 강요당하면 인간과 사회를 해치는 결과를 낳는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이유로 네 가지를 들었다.
첫째,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근본적으로 옳지 않은 전제가 없는 한 침묵을 강요당하는 어떤 의견이 진리일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둘째, 침묵을 강요당하는 의견이 틀렸다고 해도 일부 진리를 담고 있을 수 있으며 실제로 그런 일이 흔하다. 통설이나 다수 의견이 전적으로 옳은 경우는 드물거나 아예 없다. 대립하는 의견들이 서로 부딪치게 해야만 나머지 진리를 찾을 수 있다.
셋째, 통설이 진리일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해도 제대로 검증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 근거를 이해하지도 못한 채 하나의 편견으로 간직하게 될 것이다.
넷째, 소수 의견에 침묵을 강요하면 다수 의견 또는 통설이 독단적 구호로 전락해 이성이나 개인적 경험에서 강력하고 진심어린 확신이 자라나는 것을 가로막게 될 것이다.
보수정권이 들어서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급격히 후퇴한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이러한 밀의 얘기를 상기시켜주고 싶다. 진정으로 인간과 사회를 위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대신 우리는 행동을 해야겠지.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세번째 대답은 계급지배의 도구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주장한다. 국가는 만인의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 국가는 소수의 지배계급이 다수의 피지배계급을 억압하고 착취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의 평등과 자유를 위해서 국가를 없애버려야 한다고 했다. 이를 도구적 국가론이라고 한다.
이러한 국가론의 부작용의 하나가 정치 무용론과 정치적 냉소주의이다.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에게는 '근본적인 변화'가 중요하다.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데 기여하지 못하는 정치행위는 의미가 없다. 정권교체, 법률개정, 국가재정구조와 조세제도 변경 등을 둘러싼 현실의 정치적대립과 변화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계급착취의 현실을 수용하는 가운데 벌어지는 '부르주아 정치세력들 사이의 권력다툼'에 불과하다. 어느 정당이 집권하고 누가 대통령이 되든, 그런 식으로는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 대중이 부르주아 정치집단 사이의 권력투쟁에 휩쓸려 들어가고 '근본적' 변화를 추구하는 혁명적 정치세력을 지지하지 않는 것은 교육과 언론, 미디어를 모두 장악한 지배계급이 대중의 계급적 각성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혁명을 통해서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하는데, 그런 방식이 아닌 방식은 모두 개량주의적이고, 결국에는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에 봉사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근본적인 변화가 중요하긴 한데, 말처럼 쉽지는 않다.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수주의 국가관은 자본주의 비판이론으로서 의미가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현실적 위력은 거의 사라졌지만 자본주의 비판이론으로서의 생명력만은 다 타버린 것처럼 보이는 화로 밑바닥에 작은 불씨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진화의 시간이 아닌 역사의 시간에 그것이 큰 불길로 다시 살아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영원히 죽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좌절한 인류의 꿈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때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고, 불가능한 꿈을 향해 달려간다. 결코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별을 바라보며 가슴 설레는 것처럼, "한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사회"에 대한 꿈은 언제든 사람을 다시 설레게 할 수 있다.
사회주의가 멸망한 마당에 마르크스주의가 무슨 소용이 있냐는 주장에 이 문장들을 보여주고 싶다. 우리의 꿈을 담고 있다고.... 약자의 편에서, 자유와 정의를 향해 온몸을 던지던 그 뜨거운 것을 버릴 수는 없을 것 같다. 문장 자체를 보면 글의 제일 마지막에 쓰는 글 같은데 글은 그 다음 내용으로 이어진다.
2. 누가 국가를 다스려야 하는가
이 책의 두번째 화두는 누가 국가를 다스려야 하는가 이지만 논의를 하다보면 현대에 와서는 최선의 통치자를 만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최악의 통치자를 피하는 방법으로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진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만들어진 것이다.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목적은 가장 훌륭한 사람을 권력자로 선출하여 많은 선을 행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사악하거나 거짓말을 잘 하거나 권력을 남용하거나 지극지 무능하거나 또는 그 모든 결점을 지닌 최악의 인물이 권력을 장악하더라도 나쁜 짓을 많이 저지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목적이며 강점이다. 권력자가 헌법과 법률이 부여한 권한범위 안에서 합법적 수단으로만 통치하도록 하는 법치주의, 언론, 출판, 사상, 표현, 시위의 자유 등 국민의 기본권은 법률로도 그 본질적 내용을 침해할 수 없도록 한 헌법, 입법부와 사법부를 행정부와 분리하여 서로 감시하고 견제하도록 하는 삼권분립, 감사원과 국가인권위원회 등 국가권력의 오남용을 예방하고 시정하는 일을 주된 임무로 하는 독립적 국가기관 설치, 복수정당제와 같은 제도화된 권력분산과 상호견제 장치가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핵심이 된 것은 모두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여태까지 민주주의를 바라면서 민주주의가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도 몰랐던 것이다. 매번 선거에서 이런 사람을 뽑을 바에는 선거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면서 비판을 했었는데, 사실 어떤 사람이 당선되어도 최악으로 가지 않도록 막는 것을 민주주의가 했던 것이다. 만일 최악의 인물이 되어서 전횡을 휘두르는데도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이를 막지 못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의 상황은 완벽한 민주주의라고 보기는 힘든 것 같다.
3. 국가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국가를 바꾸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혁명, 또하나는 점진적 개선.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두 길은 다른 길이 아니다. 처음에는 점진적 개선의 길로 간다. 지배층에 개선을 요구한다. 지배층이 요구를 들어주면 된다. 지배층이 요구를 안 들어주면? 또 요구한다. 또 안 들어주면? 계속 요구하다가 더이상 요구하는 것으로는 변화할 것 같다고 판단이 들면 혁명이 일어난다. 한마디로 개량의 길이 봉쇄되면 혁명의 문이 열린다.
4. 진보정치란 무엇인가
여러 국가론을 말하면서 진보와 보수를 얘기했는데, 그러려면 진보의 개념을 세울 필요가 있다. 그 중에서 지은이가 소개한 견해가 내가 생각하는 진보와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뽑아보았다.
이남곡에 따르면 진보는 인간이 행복을 위해 자유를 확대해나가는 과정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유를 억압하는 것들에서 인간을 해방시켜야 한다. 이것을 지향하는 것이 진보주의이다.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얽어매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 불합리한 제도, 물질의 결핍, 낡은 생각이 그것이다. 진보는 첫째,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제도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노예제도, 신분제도, 계급제도, 독재, 자의적인 국가폭력 등 불합리한 제도는 인간을 억압하고 자유를 박탈했다. 인간은 수많은 사회혁명과 점진적 개량을 통해 자유를 증진해왔다. 둘째는 물질의 결핍에서 인간을 해방하기 위한 생산력 발전이다. 자유는 물질의 절대적 결핍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숨 쉬지 못한다. 따라서 과학기술의 발전도 진보에 큰 기여를 했다고 인정해야 한다. 셋째는 인간의 의식을 변혁하는 것이다. 남과 자연을 침범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남에게 먼저 양보하고 싶어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과학, 종교, 영성운동보다도 진보의 중요한 영역이 된다.
포괄적인 얘기처럼 보이지만 상당히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어느 누가 반대할 것인지 의문이다. 이를 실천하기 위한 방법으로 견해차가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5. 국가의 도덕적 이상은 무엇인가
국가의 도덕적 이상이란 말이 낯설지만 도덕적인 것 중에서 무엇을 위해 국가가 존재해야 하느냐라고 물었을 때에 대한 대답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헌법에 나타나 있는 우리나라의 도덕적 이상은 무엇일까?
대한민국 헌법이 규정한 국가공동체의 최고 목표 또는 최고 가치는 자유, 복지, 평등, 안전, 평화, 환경 등이다. 자유는 자유권적 기본권에 대한 침해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말한다. 복지는 1인당 국민소득으로 표현되는 좁은 의미의 물질적 후생을 넘어 국민의 삶의 질을 가리킨다. 안전은 범죄뿐만 아니라 각종 재해와 실업, 질병, 노령 등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보호받는 것을 의미한다. 평화는 군사적 위협에 대한 단순한 방어를 넘어 한반도에서 무력충돌과 전쟁의 위험이 항구적으로 제거된 상태를 의미한다. 환경은 단순한 주거환경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자연생태와 생활환경의 정착을 의미한다.
대한민국 헌법 정말 훌륭하다. 나무랄데가 없다. 그냥 그대로 실천하면 되겠다. 이런 가치를 헌법에 넣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표하고 싶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를 실현하지 못하는 통치자에게는 비판을 가한다. 제대로 좀 하라고....
6. 정치인은 어떤 도덕법을 따라야 하는가
지은이는 막스 베버가 말한 책임윤리를 제시하고 있다.
인간의 완전성과 선을 전제하지 않고, 인간과 사회를 있는 그대로 보면서, 자기의 신념에 따라 행동할 때 얻게 될 "예견할 수 있는 범위 내의 결과"를 자기 자신의 책임으로 껴안는, 그리고 행위의 동기가 아니라 행위의 결과로 책임지려는 태도이다. 이것이 반드시 칸트의 도덕법을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강제력을 가지고 일하는 국가권력과 관계를 맺은 사람은 때로 칸트의 도덕법을 외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스스로 세운 행위의 준칙이 아니라 단순한 '끌림의 충족'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면서 '실용적 처세의 법칙'에 따라 살아가는 대중의 요구와 그들이 요구하는 행위의 준칙을 받아들여야 한다. '변질'의 위험을 안고 신념윤리와 책임윤리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것, 그것이 정치를 통해서 선을 추구하는 자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한마디로 정치하지 말라는 말처럼도 들린다. 때로는 신념에 따라서, 때로는 책임을 추구하면서 행동하라는 것이고, 때로는 변질했다고 욕먹을 수도 있는 행동을 하라는 것인데..... 과연 정치인들은 어떤 것을 추구해야 할까? 너무 어렵다.
글의 마지막 내용은 연합정치에 대한 내용이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어떻게 연합할 것인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진보의 힘이 '순수'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진보의 힘은 '섞임'에서 나온다. 진보를 추동하는 근본적인 힘은 인간의 보편적 이성이다. 사회의 진보는 인간 이성의 발전과 함께 이루어진다. 하나의 이념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사회에서 이성이 성장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의 이념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정지조직에서도 이성의 힘이 자라기는 어렵다고 믿는다. 다양성을 내포하지 않고서는 정당도 정치도 국가도 인간도 성장하지 못한다. 이념과 정치문화의 '섞임'을 통해 진보의 힘을 키우는 것이 연합정치이다. 연합정치가 지지를 받는 것은 국민들이 그 속에서 정치인의 책임의식을 보기 때문이다. 신념윤리에 투철한 정치인은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책임윤리에 투철한 정치인은 존경과 믿음의 대상이 된다. 자유주의자와 진보주의자가 대중의 존경과 믿음을 받는 길이 바로 연합정치에 있다. 연합정치를 통하지 않고서는 훌륭한 국가를 만들 수 없다.
자유주의자와의 연합을 얘기하는데, 어떻게 보면 개량적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다. 연합했다가 오히려 이용만 당할 수도 있다는 현실적 비판도 있을 수 있겠고.....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몰랐던 내용이 참 많았다.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세 가지 생각, 국가의 도덕적 이상, 민주주의의 기능, 진보정치, 연합정치 등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면서 읽으니까 정말 중요한 내용을 우리는 모르고 이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민주주의를,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보통사람들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올해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서 최고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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