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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26] 불멸의 신성가족: 법조계에 말 붙이기행간의 접속/사회 2016. 5. 15. 10:16책이름: 불멸의 신성가족곁이름: 대한민국 사법 패밀리가 사는 법지은이: 김두식펴낸곳: 창비펴낸때: 2009.05법학자 김두식이 법조계에 몸 담고 있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인터뷰하여 엮은 책이다. 그렇다고 인터뷰집은 아니고,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질적 연구서이다. 법조계에 대해서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관련되는 사람들의 발언을 통해서 어느 정도 알 수 있었고, 신문이나 뉴스를 통해서 접하는 것보다 문제가 훨씬 심각할 수 있다는 생각도 했다.프롤로그에서는 질적 연구의 필요성에 대한 얘기를 하는데, 양적 연구의 한계점을 말한다. 양적 연구에서 판사의 청렴도에서 아니다라고 응답한 사람이 있을 경우 그의 대답의 가치는 1000분의 1만큼만 차지한다. 하지만 그 수치로는 그가 겪은 험한 일의 정도나 깨달음 등을 표현할 수 없다. 결국 다수의 의견에 소수의 의견은 묻힐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양적 연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심층 면담과 같은 질적 연구로 한다는 것이다.제1장에서는 법이 공정하지 않아 피해를 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약자가 권리를 침해받고 있을 때는 침묵하던 법이, 견디다 못한 약자가 그걸 세상에 알리고 바로잡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순간, 뒤늦게 개입하여 약자만을 처벌한다." 예를 들면, 학교측의 비리를 고발해도 법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침묵하다가, 학생들이 학교 주차장을 점거했다는 이유로 업무방해죄를 적용하는 것 등이 있다. 기가 찰 노릇이다.제2장에서는 판, 검사들과 돈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판검사들이 변호사와 밥을 먹으면 항상 변호사가 돈을 낸다. 이걸 밖에서 보면 변호사가 판검사들에게 향응을 제공하거나 접대를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판검사 입장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한다.법조계에 대한 비판이 심해지고, 판검사 윤리가 강화될수록 판검사들은 교류의 범위를 좁혀 정말 '믿을 만한' 사람하고만 어울리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래도 사법시험 동기거나, 판검사 생활을 함께 한 사람들이지요. 그 사람들과 식사를 하고 나면 누군가 돈을 내야 합니다. 애초에 접대하는 자리가 아니라면, 대개는 그냥 여러 명이 어울려 누가 돈을 낼지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식사나 술부터 함께 하게 되지요. 식사가 끝나고 돈을 낼 때가 되면 누가 돈을 낼까요. 대개 변호사입니다. ....<중략>..... 변호사가 돈을 내는 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모인 사람 중 가장 돈을 많이 번다고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친구가 여러명 모였을 때 가장 돈을 많이 버는 (또는 번다고 믿어지는) 사람이 돈을 내는 것은 우리사회에서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거기다가 판검사들은 사건과 관련 있는 변호사와는 밥을 먹지 않기 때문에 부정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변호사 친구와 밥 먹는 것까지 비리라고 하면 판검사들은 인간관계를 다 포기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면서.... 그렇지만 그 변호사 친구를 언젠가는 사건으로 만나게 된다면 그 때에는 공정하게 할 수 있을까? 공정하게 한다고 하지만, 확인할 수는 없다.
제3장에서는 평판에 대해서 얘기한다. 법조계에 있는 사람들은 법원 직원 전체를 가족으로 본다.
저는 법원이나 검찰에서 가족이라는 표현을 들을 때마다 바로 이 신성가족을 떠올립니다. 법원 신성가족의 일원일 되려면 사법시험이라는 어려운 시험에 합격해야 할 뿐만 아니라 판사직 진입이라는 더 좁은 관문도 통과해야 합니다. 일단 이 관문을 통과하면,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또하나의 가족'이 되어 청탁이 '순수'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습니다. 돈과 압력이 개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가족 내부의 청탁은 변호사들의 청탁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됩니다. 변호사들의 청탁은 어떤 순수의 탈을 써도 결국은 돈과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가족들의 청탁을 신경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평판이다. 검사나 판사나 모두 관료주의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인사나 승진 등에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으려면 평판을 관리해야 한다. 청탁에 대해서 원리원칙대로 처리하면 '또라이'로 찍혀서 회복하기 어렵게 된다. 그래서 청탁을 들어주지 않아도 말로라도 '고려하겠다'고 립서비스를 한다.
제4장에서는 브로커에 대해서 얘기한다. 우리는 브로커라는 전문 직업인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데, 브로커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변호사에게 일을 소개해주고, 돈을 받으면 누구나 브로커이고, 본업보다 브로커 일이 더 우선시 되면 전문 브로커인 것이다. 대개 사무장이나 법원이나 검찰의 전현직 공무원, 경찰, 법무사, 세무사, 관세사 등 법조계 주변에서 법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은 브로커가 될 수 있다.
제5장에서는 법조인이 이겨내야 하는 여덟가지 유혹을 얘기한다.
첫번째 시험: 새로운 언어로의 입문, 사법시험
두번째 시험: 결혼시장의 유혹
세번째 시험: 끝없는 서열경쟁과 관료제의 늪 속에서
네번째 시험: 판사는 없고 학동만 있는 양성씨스템
다섯번째 시험: '원만함'의 한계와 권위주의
여섯번째 시험: 살인적인 업무량
일곱번째 시험: 변호사 개업, 작렬하는 포스, 초라한 내면
여덟번째 시험: 감시자도 삼켜버리는 블랙홀
여덟가지 유혹이라고 하는데, 사실상 관문? 혹은 문제점이라고 이해해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그 중 법원에서 승진을 위한 엘리트 코스는 법원행정처이다. 그럼 어떤 사람들이 여기에 뽑힐까?
법원행정처에서 일할 판사를 뽑을 때 일 열심히 하고, 성실하고, 책임감 있고, 머리 잘 돌아가는 것은 기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덧붙여 중요한 것이 "원만함"입니다. 윗분들을 모시고 일해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무난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중략>... 윗분들과의 원만한 관계는 기본이고, 거기에 덧붙여 "화 잘 안 내고, 다른 사람 말 잘 들어주고, 동료들 사이에서 평가도 좋은" 사람이 원만한 판사가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뽑힌 사람들은 고등법원 부장판사, 그 이후의 요직들을 거치게 되는데, 이유는 기준이 같기 때문이다. '능력'과 '원만함'. 법원행정처가 교육청 같은 것 같다. 교사들이 장학사 되고, 교장 되려고 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 다음 법원의 판사 양성씨스템은 도제식이다. 부장판사가 그 밑의 배석판사들을 옆에 두고 가르치는 것이다. 판사는 그 자체로 독립적인 기관이라는 헌법의 문구는 말 그대로 문구일 뿐이다. 배석판사들은 목소리도 못 내고, 선배 판사들이 한 판례를 기계적으로 따른다. 그게 가장 안전하니까. 그러면서 스스로 독립적인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을 가르친 부장판사가 법복을 벗고 변호사가 된다고 해도 그 관계가 끊어지는 것도 아니다. 사제관계로서 연결되고, 전화 한 통이 판결에 영향을 안 미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전관 출신이 큰 소리 치는 것이고...
그리고 살인적인 업무량. 가끔 텔레비젼에서 판검사, 변호사들의 일하는 장면을 보면 서류 뭉치들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고, 거기에 파묻혀서 매일 야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 장면을 얘기하는 것이다. 그러니 사건의 조사, 사건의 변호, 사건의 판결들이 형식적이고, 권위적이고, 대충 판례에 따라 가는 방식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모든 사건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비슷비슷한 작은 사건들은 묶여서 판단될 수밖에 없고, 한 사람, 혹은 한 가족의 생애가 걸린 사건이 판검사, 변호사들에게 사건은 처리해야 할 일거리로 여겨질 뿐이다. 이런 가운데에 판검사와 변호사들 사이의 감정도 개입한다.
이런 판검사의 일상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은 사건 당사자들이겠지만, 변호사들도 어려움을 겪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판검사들은 이처럼 살인적인 업무량에 시달리면서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판검사들의 눈에 들오는 사람이 변호사들입니다. 몇건 안되는 사건을 가지고 왔다갔다하면서 사건 내용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변호사들을 보면 화가 납니다. 실제로 일은 판검사인 자신들이 다 하는데, 돈은 엉뚱한 변호사가 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판검사들은 자연스럽게 "변호사는 도둑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브로커에 대한 '소문'들은 판검사들의 이런 생각을 더욱 강화합니다.
좀 지나친 생각 같기도 하지만 판검사들이 변호사들을 도둑놈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은 재미있다.
마지막으로 언론까지도 공생하게 만드는 씨스템에 대한 얘기도 하는데, 기자들이 검사들의 얘기를 그렇게 받아쓰는지에 대한 얘기도 나온다.
기자와 검사는 철저히 공생관계를 맺습니다. 검사가 아무리 사건을 열심히 수사해도 "기사가 한줄도 안 나오면 그 사건은 죽습니다". 수사가 제대로 되려면 "시시콜콜한 것까지 스트레이트로 하나씩 기사로 나오다가, 박스 기사도 하나 나와주어야" 합니다. 말로는 "우리가 기소하는 내용만 보도해달라"고 하지만, 검찰 입장에서도 주변 여론을 봐가면서 수사를 해야 하고, 검찰에 우호적인 여론을 끌어내야 하기 때문에, 수사 진행상황을 "조금씩 흘려줄 수 밖에" 없습니다. 피의자가 "나쁜 놈이라는 스탠스"가 유지되지 않으면 여론이 무고한 표적수사 또는 정치수사라는 쪽으로 흐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자들은 검사들이 그렇게 흘려주는 것을 "받아먹습"니다.
그리고 기자들은 그런 검사가 의도를 갖고 흘리는 얘기들을 그렇게 받아 적을까? 이번에는 기자 입장이다.
"법원이나 검찰 쪽 이야기에 신빙성을 두고, 그에 배치되는 주장은 귀담아 듣지 않는 취재환경"이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다른 쪽 이야기까지 검증하려면 "엄청난 시간과 품"을 들여야 하는데 늘 시간에 쫓기는 기자들로서는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검찰과 법원은 공신력 있는 국가기관이기 때문에 그쪽 이야기는 그들의 멘트 자체로 바로 "신뢰성을 담보"한다고 받아들입니다. 다른 쪽 사람들의 이야기는 당장 "이 사람이 어디서 굴러온 사람인지 그 삶을 어떻게 믿느냐?"고 의심할 수밖에 없지만, 검찰 관계자가 한마디 하면 기자들도 "바로 쓰는" 방향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언론사의 데스크가 좀더 "힘있는 이야기"를 가져오라고 취재기자를 몰아세우면 검찰의 가능성은 어느새 방침이 되고, 결정이 된다. 그런다고 검찰이 항의하지는 않으니까. 또 데스크에서 아예 시나리오를 짜서 멘트와 팩트를 구해오도록 시켜서 기사를 짜맞추는 경우도 있는데, 취재기자 입장에서 가장 곤혹스러운 경우이다.
에필로그의 맨 마지막에서는 이러한 법조 문화를 변화시키는 가능성을 시민의 목소리와 용기에서 찾는다. 법조인들이 알아서 우리의 권리를 지켜주지는 않으니까. 그러면서 용기의 시작을 판검사에게 말을 붙이라고 말한다. 소통을 통해 법조인들의 문제를 깨달을 수 있게 하고, 해결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소박하지만 희망이 될 수 있는 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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