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읽었다. 사고로 기억력이 80분 밖에 유지되지 않는 수학자와 그를 도와주는 파출부, 그리고 파출부의 아들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수학자는 자신이 기억력이 80분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옷에다 항상 기억해야 할 메모들을 클립으로 붙여놓는다. 파출부의 얼굴을 잊어버릴까봐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기억해야 할 날짜를 메모하기도 하고, 수학과 관련된 공식들도 써놓기도 하고... 그리고, 그는 모든 것이 자신이 생각한 질서 속에서 존재해야지 안정감을 느낀다. 자신이 생각한 질서에서 벗어나면 긴장하고, 불안해 하며, 몸이 견디지를 못한다. 객관적인 정리 정돈도 아니고, 자신이 생각한 질서이어야 한다. 또한 어린 아이는 반드시 보호받아야 하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보호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여 아이를 보호하는 일을 모든 것에 우선시한다.
이런 수학자의 유별난 성격과 생활 습관 때문에 친구도 없고, 파출부들도 오래 버티지 못한다. 그러나 주인공 파출부와 그 아들은 우정까지 쌓아나간다. 그럴 수 있는 요인은 상대에 대한 이해와 배려이다. 상대가 자신을 본지 80분이 지나서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여 처음 보는 사람 취급을 해도, 절대로 "그 얘기는 벌써 들었어요."라고 말하지 않고, 성의껏 들으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정성을 바탕으로 세 사람은 우정을 쌓아가게 된다.
이 소설에는 수에 관한 많은 사실을 알려주는데, 특히 소수에 관한 수학자의 설명을 듣고, 소수에 대한 느낌을 얘기하는 부분은 인상적이다. 마치 숫자(소수)가 의인화되어 하나의 성격을 갖고서 생생하게 살아움직이는 느낌을 준다.
"평소 사용하는 언어가 수학에 등장하는 순간 낭만적인 울림을 띠는 것은 어째서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우애수도 그렇고 쌍둥이 소수도 그렇고, 적확함은 물론 시의 한 구절에서 빠져나온 듯한 수줍음이 느껴진다. 이미지가 선명하게 떠오르면서 그 속에서 숫자들이 서로 포옹하기도 하고, 똑같은 옷을 차려입고 손을 마주 잡은 채 서 있기도 한다."
그리고, 박사가 내 준 수학 문제를 스스로 고민하고 풀었을 때의 성취감을 표현한 부분이 있는데,숫자와 수식으로 채워진 소설 속에 숨겨진 이런 문학적 표현들은 더 명민한 빛으로 독자들에게 와서 박힌다.
"그 때 난생 처음 경험하는, 아주 신기한 순간이 찾아왔다. 무참하게 짓밟혀 발자국이 어지러운 사막에 한 줄기 바람이 불면서, 눈 앞에 똑바른 길 하나가 나타났다. 길 앞에서 반짝이는 빛이 나를 인도했다. 그 속에 발을 내디디고 한껏 몸을 적시고 싶은 빛이었다. 깨달음이란 이름의 축복이 내게 쏟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수학자가 왜 자신이 수학을 할 수밖에 없는지, 수학을 왜 사랑할 수밖에 없는지말하는 장면에서는 인생의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다.
"물질이나 자연현상, 또는 감정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영원한 진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야. 수학은 그 모습을 해명하고, 표현할 수 있어. 이무것도 그걸 방해할 수는 없지."
그러나 이 소설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가 있다. 박사가 고용인이 파출부과 싸우는 장면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놓은 오일러의 공식이 있는데,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소설을 이렇게도 쓸 수 있다는 새로운 느낌을 받을 수 있어서 좋았다. 영화 『
박사가 사랑한 수식』도 만들어서 개봉했었다는데, 기회가 되면 영화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