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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사전 |
카테고리 |
시/에세이 |
지은이 |
김소연 (마음산책, 200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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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대해서 설명하라면 우리는 얼마나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책은 감정과 생각 등과 관련된 낱말들의 뜻을 시인인 작가가 마음대로 그 의미를 풀어쓴 책이다. 그 설명이 잘 맞는 것도 있고, 어려운 것도 있다. 글쓴이가 시인이라서 시적으로 쓴 것은 좀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도 곰곰히 생각해 보면 잘 잡히지는 않지만 어렴풋하게 느낌이 오는 것도 있다. 마음이 원래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잘 잡히지 않지만 느껴지는 것.
그 중에서 인상적이거나 멋있거나, 느낌이 있는 것들을 뽑아봤다.
감정은 세세하기 때문에 명명될 수 있지만, 기분과 느낌은 명명이 불가능하다. 감정이 한 칸의 방이라면, 기분은 한 채의 집이며, 느낌은 한 도시 전체라 할 수 있다. 감정은 반응하며, 기분은 그 반응들을 결합하며, 느낌은 그 기분들을 부감한다.
감정과 기분과 느낌, 비슷하면서 조금씩 다른데, 그 차이를 얘기하고 있다. 그럴 듯 하다.
(중요하다 : 소중하다) 소중한 존재는 그 자체가 궁극이지만, 중요한 존재는 궁극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이다.....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 소중하기 때문에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은 게 당신과 나의 소망이었다.....우리는 중요한 것들의 하중 때문에 소중한 것들을 잃는 경우가 많다. 중요한 약속과 소중한 약속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중요한 약속에 몸을 기울이고 만다.
중요하다와 소중하다의 차이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우리 일상에서는 중요한 것이 소중한 것보다 더 많이 쓰인다. 왜? 중요하니까... 그러면서 소중한 것을 차차 잃게 되는데, 소중한 것들을 다시 찾아야한다.
(행복 : 기쁨) 행복은 스며들지만, 기쁨은 달려든다. 행복은 자잘한 알갱이들로 차곡차곡 채워진 상태이지만, 기쁨은 커다란 알갱이들로 후두둑 채워진 상태다. 기쁨은 전염성이 강하지만, 행복은 전염되기 힘들다. 남의 기쁨에는 쉽게 동조되지만, 남의 행복에는 그렇지 않다.... 그렇지만, 남에게서 전염된 행복은 오래 가기고 하거니와 자기 것이 된다. 그만큼 느리고 꼼꼼하게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과 기쁨, 비슷하지만 큰 차이가 있어 보인다. 행복하기 위해 우리는 자잘한 알갱이들을 차곡차곡 느리고 꼼꼼하게 쌓아야한다.
(정성 : 성의) 정성에는 의도가 없지만 성의에는 의도가 있다. 정성은 저절로 우러나오는 지극함이지만, 성의는 예를 갖추기 위한 노력의 결과다..... 정성 어린 선물은 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판단하지 않는다. 그냥 주고 받는다. 선물이라는 물건 자체보다 애정을 선물하는 것이다. 성의가 담긴 선물은 판단하게 만든다. 성의를 봐서라도 받는 사람이 무언가를 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요구가 있다.
정성과 성의, 역시 큰 차이가 있다. 교단에 있으면서 이 정성과 성의를 구분하기 힘들지만, 나는 일단 다 정성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리고, 그 정성은 반드시 학년이 끝나는 2월에만 담으라고 말한다. 그럼 정성과 성의는 어느 정도 구분되더라.
(유쾌 : 상쾌 : 경쾌 : 통쾌) 유쾌한 사람은 농담을 적절하게 활용하며, 상쾌한 사람은 농담에 웃어줄 줄 알며, 경쾌한 사람은 농담을 멋지게 받아칠 줄 알며, 통쾌한 사람은 농담의 수위를 높일 줄 안다. 고민스럽고 복잡한 국면에서, 유쾌한 사람은 상황을 간단하게 요약할 줄 알며, 상쾌한 사람은 고민의 핵심을 알며, 경쾌한 사람은 고민을 휘발시킬 줄 알며, 통쾌한 사람은 고민을 역전시킬 줄 안다. 유쾌함에는 복잡함을 줄인 흔적이, 상쾌함에는 불순물을 줄인 흔적이, 경쾌함에는 무게를 줄인 흔적이, 통쾌함에는 앙금을 없앤 흔적이 남아 있다.
광고 문구에서 유쾌, 상쾌, 통쾌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이제는 관습적으로 쓰여서 느낌도 잘 오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 나와 있는 설명을 읽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분명히 그 느낌을 마음 속에 각인시킬 수 있다. 이게 진짜다.
'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다. "너는 나를 이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원하는 내 모습으로 나를 잘 오해해준다는 뜻이며, "너는 나를 오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보여주지 않고자 했던 내 속을 어떻게 그렇게 보았느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나를 보이고 싶지 않음과 보이고 싶음 사이에서 우리는 이해와 오해를 혼동하여 쓰고 있는 상황에서 해와 오해에 대한 이 설명은 면도날처럼 날카롭지만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무장해제 당했다.
(저항 : 반항) 저항은 하나의 목소리지만, 반항은 하나의 포즈다. 저항은 근본을 뒤바꾸는 혁명을 꿈꾸지만, 반항은 근본을 외면한 채 탈주만을 꿈꾼다.....저항은 문제가 해결되면 멈추지만 반항은 스스로 멈추고 싶을 때 멈춘다. 그러나 멈춘 이후에, 저항은 자기를 억압하던 대상의 방법들을 닮아가며, 반항은 자기가 반항하던 대상을 닮아간다.
저항과 반항을 얘기했는데, 다 맞는 것 같다. 그런데, 마지막에 '저항은 자기를 억압하던 대상의 방법들을 닮아간다'는 말은 잘 머리 속에 그려지지 않는다. 억압하던 대상의 방법이 뭘까?
(위선 : 위악)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의 위선은 나의 식은 사랑과 당신의 식지 않은 사랑의 간격을 메우기 위하여 필요하고,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의 위악은 나의 식지 않은 사랑과 당신의 식은 사랑을 견뎌내기 위하여 필요하다.
위선과 위악에 대해서는 이 앞부분에도 길게 있었지만 이 부분의 설면만으로도 충분히, 절절히 와닿는다. 눈물겨울 정도로...
이 밖에도 길게 설명하지 않고, 짧게 한두줄로 풀이해놓은 낱말들도 있는데, 이 부분도 빼놓을 수 없다.
갈등: 욕망이 가장 솔직하게 균형 잡히 상태
갑갑함: 잡풀들이 좁은 틈에 뿌리 내리고 자라듯이, 적응하기로 작정하면 아무 문제 없는 것
강하다: 갑각류처럼 뼈를 껍질로 환치시킨 상태. 내면은 뼈 없는 여린 속살뿐.
결정: 장고 끝에 악수를 두는 것
고마움: 미안함의 밀도가 높을수록 발화하기 어려워지는 것
관습: 개인을 고려하지 않기로 한 약속들
난해하다: 기꺼이 오해하기에는 조심스럽거나 오해조차 동원하고 싶지 않다
모르다: 모호성을 존중하는 신중함이거나, 호기심이 사산된 상태
설렘: 뼈와 뼈 사이에 내리는 첫눈
흔들림: 가장 부드럽고 진솔한 상태. 견딜 만한 혼란
희망: 삶의 진자운동을 일으키는 자기장. 흔들리고 흔들리다 보면 닿게 되는 지점
이 중에서 설렘에 대한 설명이 시적인 것 같다. 그런데 뼈와 뼈 사이는 어떤 부분, 어떤 상황을 말하는지 모르겠다. 정말 상상력을 동원해야한다.
시를 쓰면 낱말에 대해 생각이 많아지는 것 같다. 낱말들의 미묘한 차이를 시적인 언어로 풀어내려면 감각의 촉수를 최대치로 놓고 세상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할 것 같다. 그런 후에 나온 낱말들은 정말 통통 튀는 살아있는 언어가 될 것이다.
시인이 존경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