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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58, 59] 칼의 노래 1,2: 절망을 껴안고 견디는 사내행간의 접속/문학 2013. 7. 17. 21:45
1. 절망 속 사내의 담담함
이순신의 이야기이다. 단 영웅으로서의 이순신이 아닌 온몸으로 절망을 품고 견딘 인간으로서의 이순신을 담고 있다. 전쟁 속에서 외적은 쳐들어오고, 백성들은 죽어가고, 군기는 허물어져 있고, 장비도 허술하고, 조정은 피신하고, 서로 모함하고, 도무지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어떠한 존재도 없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절망을 그대로 끌어안고 견디고 있다. 거기다가 죽음까지도 끌어안고서.... 그리고 그 태도는 지극히 담담하다. 그를 분노하게 하는 상황에서 마음 속 칼이 웅웅거리지만 엄청난 자제력으로 참아낸다.
2. 죽음에 대한 자세
전쟁은 죽음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고, 당연히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 때 그의 생각을 담은 부분을 인용해본다.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의 교서를 받았을 때 나는 김덕령의 죽음과 곽재우의 삶을 생각했다. 나는 김덕령처럼 죽을 수도 없었고 곽재우처럼 살 수도 없었다. 나는 다만 적의 적으로서 살아지고 죽어지기를 바랐다. 나는 나의 충을 임금의 칼이 닿지 않는 자리에 세우고 싶었다. 적의 적으로서 죽는 내 죽음의 자리에서 내 무와 충이 소멸해 주기를 나는 바랐다.
김덕령은 의병으로 참전하고 많은 공을 세웠으나 모함으로 억울한 죽음을 죽었고, 곽재우는 고향으로 돌아가 조용히 묻혀서 지냈다. 이 둘의 생과 사를 거부하고, 전장에서 무인으로 죽기를 바라는 모습은 비장을 넘어서 숭고하기까지 하다. 이러한 자세는 후퇴하는 적군을 그냥 보내지 않고 싸운 것과도 관련이 있다. 풍신수길이 죽자 일본군은 후퇴를 하는데, 명의 장수는 그냥 가게 놓아두라고 하지만 이순신은 그것은 장수의 자세가 아니다. 그들이 한 일을 생각하고, 자신이 한 일을 생각했을 때 그냥 보내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싸운다. 그러다 결국 노량해전에서 죽는다. 죽음에 대한 그의 자세가 평범했다면, 굳이 싸우지 않았을 것이고, 죽지 않았을테지만 그런 삶을 원하지 않고, 그런 죽음을 원했던 것이다.
3. 전쟁의 비참함
이 소설에서는 전쟁의 비참함도 나온다. 목을 베는 장면이 수도 없이 나온다. 죄를 지은 사람을 죽이는 것도 적군을 죽이는 것도 다 목을 베는데 정말 비참하다. 바다에 빠져 죽은 적군을 건져내서 머리만 베어서 망태기에 모아서 승전을 증명한다. 잘린 목에서 피가 쏟아지고 벌레가 끼고 하는 장면들은 정말 비참하다.
또한 명에 대한 조정의 비굴한 태도도 자존심도 상하고, 그 자체가 처참하다. 왕이 명의 장수 앞에서 울면서 부탁하고, 매일 같이 수모를 당하면서 접대를 하고... 이순신에게도 잘 대접하라고 하니 정말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 수도 있을 것 같다. 사대주의, 단순히 명을 숭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상항에서는 굉장히 치욕적인 경험인 것이다.
4. 새벽의 안개
전쟁의 비참함 속에서 어느 안개 낀 새벽에 접하면서 젖어드는 명상은 이순신의 내면의 깊이를 보여주기도 한다.
새벽 순찰 길의 바다 안개는, 보이지 않는 바다 저편의 냄새를 실어다 주었다. 새로운 싸움을 예비하는 새로운 시간이 안개에 실려 내 몸 속으로 스몄다. 바다에는 지나간 것들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바다는 언제나 낯선 태초의 바다였다. 수평선 너머에서 새롭게 다가오는 시간들이 적인지 아군인지 식별할 수 없었다.그 시간은 싸움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은, 맑은 시간이었다. 피아를 식별할 수 없는 그 새로운 시간만이 새로운 싸움을 싸워나갈 수 있는 바탕이었다. 새벽 바다에서 낯설고 맑은 시간들은 안개에 실려 내 몸 속으로 흘러들어왔다. 그 시간들을 다 건너가고나서야 나의 전쟁은 끝날 것이었고 그때 비로소 나의 생사, 존망은 하나로 합쳐져 평안할 것이었는데, 새로운 시간의 파도는 끝도 엇이 밀어닥쳤다. 새벽 바다에서 죽은 여진을 향한 나의 성욕은 무참했다. 아침 안개가 일찍 삭으면 날이 개었고 안개 갇힌 뒤 무지개가 서면 저녁 무렵에 비가 내렸다.
새벽, 안개라는 상황에서 태초의 모습, 싸움이 없는 평화의 시간을 접하면서 절망의 시간들을 견디는 것 같다.
5. 김훈의 소설들
최근 김훈의 소설들을 접하면서 담담하고, 사색적이며, 건조하지만 깊이 있는 문체를 접하게 되었고, 이런 문체가 다른 작가들과는 다른 곳에 그를 위치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드러움이 없을 것 같지만 역설적이며 시적인 표현들로 거친 힘을 다듬고 있는 모습은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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