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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45] 박헌영 평전: 치밀해서 비극적인 혁명가행간의 접속/에세이/인물 2012. 10. 3. 09:00
1. 박헌영의 삶
1900년에 충남 예선에서 태어나 대흥보통학교를 나오고 경성고보를 들어갔다. 촌에서 최고 명문학교에 들어간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똑똑하고 명민한 인물인지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3·1운동에 참여하여 하였고, 졸업 후 동경에 갔다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깨닫고, 상해로 망명한다. 동경과 상해를 간 이유는 당연히 독립을 위한 일을 찾기 위해서이다. 상해에서 고려공산청년단 상해회를 조직하고, 본격적인 공산당 활동을 한다. 국내에 들어오다가 잡혀서 복역 후 서울에서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자 생활을 하면서 비밀리에 조선공산당 창당 활동을 함. 일제 시대에 그가 주로 한 일은 조선공산당 창당과 재건 작업 등 조직 활동이 대부분이다. 물론 그런 활동을 한 궁극의 목적은 조국의 해방일테고. 그 과정에서 29년에 병보석으로 나와 있으면서 조선을 탈출해 모스크바로 가서 국제레닌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공산당의 최고위간부를 양성하는 학교로 김단야, 호치민 등과 함께 다녔다. 졸업 후 상해에서 조선공산당 재건 활동 하다 잡혀서 복역하고, 39년에 출소하여 지하활동을 한다. 이 때부터 경성콤그룹과 접촉하여 조선공산당 재건 활동을 다시 한다. 45년 해방을 맞아 조선인민공화국 인민위원을 맡아서 활동하고,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여 합법적인 공산당 활동을 한다. 46년 찬탁과 반탁의 혼란 속에서 반탁을 했다 평양 방문 후 찬탁으로 돌아서는 바람에 공산당에 대한 여론이 완전히 돌아서게 되고, 미 군정의 공산당에 대한 탄압으로 제대로 된 정치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어 월북하게 된다. 월북 후 대남 활동에 집중하고, 한국 전쟁 준비를 위해 김일성과 함께 모스크바와 북경 등을 다니며 활동한다. 전쟁 후 간첩 혐의로 숙청된다.
2. 박헌영의 한계
박헌영의 활동 속에서 그가 가진 한계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있다. 국제레닌학교 교수들이 얘기한 것인데, 이론적인 측면은 굉장히 치밀하고 깊이가 있지만, 실천적인 경험은 부족한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언제나 조직의 최고지도부에서 조직을 대표하고 이끄는 역할만을 맡아 왔지 기본대중 속에서 조직적 경험을 한 적이 없다.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조선공산당을 조직하고 재건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그는 공부한 이론에 대해서는 빈틈없이 깨우치고, 적용하여 교조적인 원리주의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이런 모습이 그를 불변의 공산당 지도자로 만들었지만 위대한 역사적 혁명가로 만들지는 못했다. 인간적인 면모가 조금 더 있었더라면 아쉬움이 남는다. 아울러 대중 앞에 나서는 것도 꺼려하여 대중을 휘어잡는 다른 활동가들과도 비교가 되었다.
3. 여운형에 대해서
같은 시기를 산 사람들이기 때문에 여운형에 대한 이야기도 나름 들어 있다. 상해에서 박헌영이 주세죽과 결혼을 할 때, 여운형이 주례를 서주었다는 것이 흥미롭고, 그러면서 여운형에 대해서 이 책을 읽기 전에 읽었던 『여운형 평전』과 다른 견해를 얘기하기도 했다. 특히 여운형의 사상적인 지향을 그의 평전에서는 좌우를 아우르는 쪽에 방점을 찍은 반면 이 책에서는 공산당의 간부로서 분명한 좌익 인물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4. 북한에는 빨치산이 왜 없나?
이 책의 글쓴이는 박헌영이 미국의 간첩이었다는 북한의 주장을 반박하는 내용을 곳곳에서 지적하고 있다. 진정한 공산주의 지도자로서 미국의 간첩이었다는 것만큼 치욕적인 것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모욕과 억울함을 반드시 풀기 위해서 이 책을 쓴 것 같은 느낌도 든다. 그러면서 북한 지도부에 대한 비판을 한 것 중의 하나가 북한에는 왜 빨치산이 없었냐는 것이다. 해방 후 좌익 활동이 불법화되면서 지하로 스며든 남로당은 각 지역에서 입산하여 빨치산 활동을 했고, 전쟁 후까지도 영웅적인 투쟁을 지속하여 그 이름에 부끄러움을 남기지 않았다. 그런데, 미군이 인천상륙 작전 후 서울을 수복하고 북진하여 압록강까지 도달했을 때, 북한 지역은 미군 수중에 들어갔을 때 북한 지도부는 중국으로 넘어가서 도망만 다니고 입산하여 빨치산 활동을 하지 않았다. 북한 지역은 산간 지역도 넓어서 빨치산 활동을 했으면 훨씬 더 효율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남로당에 요구한 것과 같은 그런 활동을 왜 하지 않았냐는 것이다. 일리가 있다.
5. 한국은 진보가 뿌리내릴 수 없는 땅?
일제시대까지는 공산당에 대한, 좌익에 대한 일반 대중의 평판은 나쁘지 않았다. 그들이 지향하는 바가 대중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 지향하는 바를 경험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최소한 나쁘게 생각할 근거는 없었다. 그러나 대중이 돌아선 첫번째 지점은 신탁통치에 대한 찬탁 운동이었다. 신탁통치에 대해 찬탁으로 돌아서자 우익은 조국을 또다시 식민지로 만들 것이냐면서 공격을 했고, 여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돌아서는 민심을 잡지 못했다. 대중이 돌아선 두번째 지점은 한국전쟁이다. 전쟁을 겪으면서 공산주의를 경험한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들을 잔인하고 혐오스러운 무리로 각인하여, 결국에는 뼈속까지 반공주의자로 살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한은 공산주의, 사회주의, 진보, 좌익... 등의 사상의 뿌리내릴 수 없는 우익의 세상이 되고 만 것이다.
6. 진짜 인상적인 장면
이 책을 읽으면서 진짜 인상적인 장면은 앞쪽에 있는 사진들이었다. 특히 1929년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시절 찍은 아래의 사진을 보면 젊은 혁명가의 자신감과 기개가 잘 드러나있다. 앞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박헌영이다. 뒷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그의 첫번째 부인 주세죽이다. 뒷줄 맨 왼쪽이 호치민이다. 동양의 혁명가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한 자리에서 이렇게 모여 찍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지만 이들이 변화시키는 세상은 또 얼마나 격정적인가 생각하면 이 한 장의 사진은 의미가 깊다고 생각한다. (사진은 2004.4.1 연합뉴스 기사에서 가져왔다.)
그리고 인상적인 장면도 같은 시기 모스크바에서 찍은 아래의 가족 사진이다. (사진은 2007.7.25 동아일보 기사에서 가져왔다.) 아내 주세죽, 첫딸 박비비안나와 함께 찍은 사진인데, 그의 삶 속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로 기억되는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아내인 주세죽도 역시 남편을 도와 공산당 활동을 하였고, 그녀 역시 박헌영 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이들의 운명이 역사 속에서 기구하게 살아갔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한장의 사진이 함축하고 있는 짧은 행복은 그 삶의 비극성을 더 깊이 있게 만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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