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선생님이 대학에서 고전강독 강의한 것을 정리하여 책으로 냈다. 시경, 서경, 초사, 주역, 논어, 맹자, 노자, 장자, 묵자, 순자, 한비자, 불교, 신유학, 대학, 중용, 양명학 등 동양고전의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했다. 그래서 책도 500쪽이 넘었고, 이 책을 읽는데 한달이 조금 넘게 걸렸다. 동양고전을 넓게 망라했기 때문에 각 분야를 꼼꼼하게 다루지는 않았고, 글쓴이가 중요하다, 혹은 이야기할 만하다고 여기는 부분을 뽑아서 다루었다. 그래서 자신의 입장에서 약간은 주관적으로, 의역하여 풀어낸 것들이 있다고 얘기를 한다. 글쓴이는 고전 중에서 중요한 것을 뽑고, 나는 그 중에서 얘기할 만한 것을 다시 뽑아보려고 한다.
1. 서경
글쓴이는 서경에서 「무일」편을 얘기한다. 한마디로 군주의 도리로서 무일하라는 것, 즉 안일에 빠지지 말 것을 깨우치라는 것이다.
나는 이 「무일」편이 무엇보다 먼저 효율성과 소비문화를 반성하는 화두로 읽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능력 있고 편안한 것을 선호하는 젊은 세대들의 가치관을 반성하는 경구로 읽히기를 바랍니다. 노르웨이의 어부들은 바다에서 잡은 정어리를 저장하는 탱크 속에 반드시 천적인 메기를 넣는 것이 관습이라고 합니다. 천적을 만난 불편함이 정어리를 살아 있게 한다는 것이지요. 「무일」편을 통해 불편함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씹어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2. 주역
주역은 괘에 대한 설명을 하는데, 처음에는 잘 따라가다가 괘가 자꾸 나눠지니까 복잡해져서 파악을 하지 못했을 때에는 길을 잃은 느낌이다. 결국 괘까지 파악하는 것은 포기했지만, 세상과 삶의 원리를 이런 상징으로 대입하여 설명하려 한 생각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 중에서 자리(位)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나는 그 '자리'가 그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상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평소 '70%의 자리'를 강조합니다. 어떤 사람의 능력이 100이라면 70 정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앉아야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30 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합니다. 30 정도의 여백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여백이야말로 창조적 공간이 되고 예술적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70 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100의 능력을 요구받는 자리에 앉을 경우 그 부족한 30을 무엇으로 채우겠습니까? 자기 힘으로는 채울 수 없습니다. 거짓이나 위선으로 채우거나 아첨과 함량 미달의 불량품으로 채우게 되겠지요. 결국 자기도 파괴되고 그 자리도 파탄될 수밖에 없습니다. (중략) 개체의 능력은 개체 그 속에 있지 않고 개체가 발 닫고 있는 처지와의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고 하는 생각이 바로 주역의 사상입니다.
70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에 가고, 30의 여유를 가지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더 높은 자리, 더 좋은 자리로 가기 위해 발버둥치고, 그 자리에서는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편법을 쓰고... 자신만 잘못될 뿐만 아니라 주변과 아랫사람들에게까지 폐를 끼치는 경우도 많다. 정말 현대 한국 사회에 꼭 들려주고 싶은 얘기이다.
그리고 마지막 괘에 대해서 얘기한다.
최후의 괘가 완성 괘가 아니라 미완성 괘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깊은 뜻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변화와 모든 운동의 완성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자연과 역사와 삶의 궁극적 완성이란 무엇이며 그러한 완성태가 과연 존재하는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중략) 그리고 실패로 끝나는 미완성과 실패가 없는 완성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보편적 상황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실패가 있는 미완성은 반성이며, 새로운 출발이며, 가능성이며,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완성이 보편적 상황이라면 완성이나 달성이란 개념은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완성이나 목표가 관념적인 것이라면 남는 것은 결국 과정이며 과정의 연속일 뿐입니다.
미완성과 실패에 대한 생각이다. 완성과 성공만을 인정하는 시대에 미완성과 실패가 보편적이라고 보는 생각은 독특하게 보일 수 있으나 가만히 생각하면 진정환 완성과 성공은 어쩌면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는다. 성공과 완성의 순간 그것은 사라지고 다시 다른 과정으로 이행되고, 결국 끝은 없이 과정의 연속일 뿐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이치를 곰곰히 생각해 볼 일이다.
3. 맹자
왕이 맹자에게 자신이 좋은 왕이 될 수 있는지 물었을 때, 맹자가 그렇다고 했고, 그 이유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대신에 보이지 않는 양을 대신 잡으라고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게 왜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소나 양이나 둘 다 생명이 있는 짐승인데... 맹자가 말한 바의 핵심은 무엇일까?
이것은 동물에 대한 측은함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측은함으로 말하자면 소나 양이 다를 바가 없습니다. 소를 양으로 바꾼 까닭은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본다'는 사실입니다. 본다는 것은 '만난다'는 것입니다. 보고(見), 만나고(友), 서로 안다(知)는 것입니다. 즉 '관계'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 대목에서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동물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실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사회의 인간관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마디로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만남이 없는 사회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주변에서 '차마 있을 수 없는 일'이 버젓이 자행되는 이유가 바로 이 '만남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만남이 없는 사회에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이 있을 리 없는 것이지요.
인간의 관계는 서로 보는 데서 시작하는데, 보지 않으니 막 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서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는 얘기이다. 관계가 없으니 배려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삶은 더 팍팍해진다. 전쟁도 더 잔혹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상적인 관계는 어떤 관계일까?
사회라는 것은 그 뼈대가 인간관계입니다. 그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가 바로 사회의 본질이지요. 지속성이 있어야 만남이 있고, 만남이 일회적이지 않고 지속적일 때 부끄러움이라는 문화가 정착되는 것입니다. 지속적 관계가 전제될 때 비로소 서로 양보하게 되고 스스로 삼가게 되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남에게 모질게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없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사회적 가치도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끄러움의 문화가 필요한 것 같다. 사회지도층도 자신의 허물에 대해서 부끄러워 할 줄 모르니 학생들도 잘못을 하고서도 부끄러하거나 반성을 할 줄 모른다. 어디 부끄러움을 가르쳐 주는 학교 없나?
4. 장자
장자의 이야기 중에서는 불치병자 이야기가 나온다. 불치병자가 아기를 낳고 급히 아이를 살펴보았는데, 그렇게 급히 아이를 살펴본 이유는 아이가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워서였다는 이야기이다. 아이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을 두려워 한 것이다. 이는 곧 자기에 대한 반성을 의미한다고 글쓴이는 말한다.
내가 이 구절을 좋아하는 까닭은 문명론도 문명론이지만 자기반성을 이보다 더 절절하게 표현한 구절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도 '선생'들이 읽어야 할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선생들은 결과적으로 자기를 배우라고 주장하는 사람이지요. 자신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거나 자기의 일그러진 모습을 정확하게 인식하기가 어려운 처지에 있기 때문이지요. 자기를 기준으로 남에게 잣대를 갖다 대는 한 자기반성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미혹을 반성할 여지가 원천적으로 없어지는 것이지요.
교사로서 뼈아픈 가르침이다. 자신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며, 자기를 기준으로 삼지 않으면서 반성하려고 노력해야겠다. 마지막으로 득어망전(得魚忘筌)에 대한 얘기이다. 이 말의 뜻은 고기를 얻고, 통발은 잊어버린다는 뜻인데, 글쓴이는 망어득망(忘魚得網)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즉, 고기는 잊어버리고, 그물을 얻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세한 설명을 보자.
고기는 이를테면 하나의 현상입니다. 반면에 그물은 모든 현상의 저변에 있는 구조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기가 하나의 사물이라면 그물은 세상의 모든 사물을 망라하고 있는 天網인 것이지요. 고기는 잊어버리든 잃어버리든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물입니다. 모든 사물과, 모든 사건과, 모든 사태가 그 위에서 생성 변화 발전하는 거대한 관계망을 잊지 않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지요.
그물의 의미를 알아채는 것이 중요하다. 그물은 관계망이면서 동시에 과정이 쌓인 것이다. 남는 것은 승패가 아니라 우정이라고 말하는 것도 통한다.
5. 법가
법가의 이야기 중 하나다. 시장에 신발 사러 간 사람이 발의 본을 뜬 탁을 가지러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신발을 신어 보면 맞는지 안 맞는지 바로 알 수 있는데 말이다. 그 사람은 탁은 믿지만 내 발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의 말을 듣고 우리는 그를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다.
탁이란 책입니다. 리포트를 작성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탁을 가지러 갑니다. 현실을 본뜬 탁을 가지러 도서관으로 가거나 인터넷을 뒤지는 것이지요. 현실을 보기보다는 그 현실을 본뜬 책을 더 신뢰하는 것이지요. 발을 현실이라고 한다면 여러분도 발로 신어보고 신을 사는 사람이 못 되는 것이지요.
우리도 현실을 직접 대하는 것을 두려워 하고, 책이나 다른 매체를 통해서 현실을 알고 접하려고 한다. 현실은 날 것이니까... 그러나 그렇게만 해서는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을 준다.
6. 불교
화엄사상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화엄경의 본래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인데, 이는 "광대무변한 우주에 편만해 계시는 붓다의 만덕과 갖가지 꽃으로 장엄된 진리의 세계를 설하고 있는 경"이라고 풀이할 수 있지만, 글쓴이는 이와는 달리 해석한다.
'대방'은 최고의 법칙이란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광'은 단순히 넓은 개념이 아닙니다. 만약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다른 것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충분히 큰 것이고 충분히 넓은 것입니다. 한 포기 작은 민들레도 그것이 땅과 물과 바람과 햇빛, 그리고 갈봄 여름과 연기되어 있다면 그것은 지극히 크고 넓은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지요. 공간적으로 무한히 넓고 시간적으로 영원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은 '깨닫다'의 의미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 광대함을 깨닫는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지요.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한 시간과 무변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는 드넓은 거싱라는 진리를 깨닫는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저마다 찬란한 꽃이 됩니다. 아무리 보잘 것없고 작은 미물이라도 찬란한 꽃으로 태어납니다. 온 천지가 찬란한 꽃으로 가득 찬 세계를 상상해봅시다. 한마디로 장엄한 세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읽어야 하는 '대방광불화엄경'의 의미가 이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화엄사상의 깊이를 이 짧은 말 속에 다 담을 수는 없겠지만 하나의 대상을 대할 때 인식과 사유의 깊이를 상상 이상으로 크고 넓게 가져가야 그 존재의 의미에 조금이라도 가깝게 다가설 수 있게 만드는 것 같고,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대상 앞을 함부로 할 수 없으며, 오히려 겸손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세상의 모든 것이 무한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니 말이다. 학교폭력을 저질러서 오는 아이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면 아이들은 좀 겸손해질까?
7. 강의를 마치며
강의를 마치면서 그 사람의 생각을 결정하는 것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라고 말한다. 가슴을 강조한 것은 가슴이 바로 관계론의 장이기 때문이고, 모든 것을 아우르는 장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논리가 아니라 감성이라는 말과도 통하는 것 같다.
신영복 선생의 책을 읽으면 정말 가슴에 와닿는다. 똑같은 말이라도 다른 사람이 하면 그렇게 다가오지 않는데 말이다. 그것은 결국 가슴으로 사상을 쌓고, 실천으로 보여주는 진정성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