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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37] 변방의 사색: 나도 교육 고민 더 해야겠다행간의 접속/교육/청소년 2012. 9. 7. 22:00
밀양의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던 교사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실천으로 사표를 던지고, 인문학과 농업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를 준비한다. 그동안 교육 관련 지면에서 중심을 잃지 않는 시선으로 교육과 세상을 바라보았던 글들을 모아 엮은 책이다. 그의 글들 중에서 인상적인 부분들을 모아본다.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을 얘기하면서 기태가 떠난 학급은 어떤 학급인지 묻는다. 좋은 학급, 나쁜 학급, 좋지는 않지만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학급 등으로 나뉘어지는데, 그는 나쁜 학급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기태가 아무리 악이라 할지라도 기표가 두려움을 느끼고 떠나게 하는 학급은 나쁜 학급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학급은 어떤 학급인데? 기표와 공존할 수 있는 학급이라는 것이다. 세상에는 절대악도, 절대선도 없다고 봤을 때 기표를 기표답게 대우해 줄 수 있어야 하고, 기표의 악행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단 학급 뿐만 아니라 세상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반에 기표 같은 애들까지는 아니더라도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 애들이 있는데, 그 아이들의 악행에 정면으로 응시하고 대화? 좋은 학급 만들기 쉽지 않다.
서울에서 학생인권조례를 만들기 전에 경기도에서 먼저 만들었다. 그 때 한 얘기도 있다.
아이들은 늘, 언제나, 떠든다. 아이들은 머리 모양을 가꾸고 싶어 하고, 연애를 꿈꾸며 실제로 이를 실행에 옮긴다. 그리고 아이들은 무엇보다 놀고 싶어 한다. 이것은 마치 새가 지저귀고,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다. 아이들이 과하게 비싸거나 타인에게 혐오감을 주는 머리 모양을 할 때, 수업에 방해를 끼칠 때, 바람직하지 않은 연애 관계에 빠져들 때, 그것은 박멸해야 할 '교육적 악'이 아니라 이해와 공감에 바탕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주어야 할 '교육적 상황'인 것이다.
이런 당연한 얘기를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에 중요한 것은 이해와 공감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지도할 때 가장 반발하는 경우가 무조건 윽박지르고 혼내려고 하는 경우이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이들도 절대 반발하지 않고 따른다. 자기들이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까.... 아이들도 잘못한 것을 다 알고 있다. 인정하기 싫은데 강압적으로 나오니까 더 삐딱선을 타는 것이다.
아이들이 예전과 달리 교사에게 대들고, 자살하고, 수업을 방해하는 등 현재의 교육 상황을 글쓴이는 교육 불가능이라고 정의한다. 아이들에게 학교는 삶의 기술도 가르쳐 주지 않고, 성장의 경험도 제공해 주지 않으며, 노동시장으로의 진입도 보장해 주지 않는, 오직 자신들을 통제하려고만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인문학과 농업을 제시하고 있다. 인문학은 자신의 삶을 생각하게 하여 성장으로 이끌 수 있고, 농업은 인간 생존의 물적 기초를 이루기 때문이다. 약간 낭만적인 것 같지만 충분히 의미있는 제안이다.
내가 방금 농업이 낭만적이라고 했는데, 조금 뒷부분을 보니 이에 대한 그의 생각을 담은 부분이 발견되었다.
권력자들의 현실주의, 언론의 현실주의, 지식인들의 현실주의, 오늘날 사회적 담론들의 그릇에 담겨 있는 '현실'을 '현실'로서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는 이 현실주의라는 감옥의 수인으로 거기에 꼼짝없이 갇히고 만다. 나는 이렇게 믿는다. 오늘날 우리가 꼼짝없이 붙잡혀 있는 이 현실주의야말로 더없이 비현실적인 기만이자 허위이며 몽상이라는 것을. 그들이 낭만적 몽상이라 말하는 농업, 풀뿌리들의 자치와 협동, 고르게 가난한 사회에 대한 지향이야말로 이 현실에 대한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의 표현처럼 "필요한 것은 '진보'가 아니라 '개안'"이다. 오늘날, 진정한 현실주의는 눈앞에 그럴듯한 대안을 가져다주기보다는 자명한 것을 의심케 함으로써 길을 잃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현실주의는 저들 자본가, 정치인들의 권능에 기대는 것과 같이 '남'의 문제로 구조화된 것을 오롯이 '우리들 자신'의 문제로 변개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동력을 가진 것이어야 한다.
대안은 고르게 가난한 사회에 대한 지향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두려움과 공포로 앞으로만 몰아가는 사회에서는 적당히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인 것은 알고 짓는 죄보다 모르고 짓는 죄가 더 나쁘다는 그의 견해이다. 나는 알면서도 죄를 지으면 당연히 나쁜 것이고, 모르고 죄를 지으면 몰랐으니까 다음에 그러면 안 된다고 하면서 용서해주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모르고 짓는 죄가 더 나쁘단다.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탄식했듯, '자신이 하는 행동의 의미를 모르는 것', 이것이 가장 위험하다. 하나의 '대세'에 편승하여 "난들 어쩔 수 없지 않나'는 식으로 스스로의 공모를 합리화하여 일구어온 전체주의적 질서는 근본적으로 자기 행동의 도덕적 윤리적 의미를 알지 못하는 '무지'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무지는, 도무지 '생각하지 않으려는' 데에 기인한다.
죄를 짓고 몰랐다고 하는 것에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하면서 자기 행동에 책임지려 하지 않고, 옳고 그른 것을 생각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담겨 있기 때문에 나쁜 것이라는 얘기이다. 듣고 보니 그렇다. 이제부터 이런 놈들 혼내줘야 하나?
이 책을 읽고 교육에 대한 나의 고민들이 너무 미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 의식은 있지만 깊지 못하고, 대안이나 해결책도 가늠할 수 없으니.... 그래서 저자가 편집위원으로 있는 교육공동체 벗의 '오늘의 교육'을 좀 읽어보고 괜찮으면 조합원으로 가입을 할까도 생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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