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간의 접속/사회

[책 17] 살림의 경제학: 돈벌이 경제 속에서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 꿈 깨!

뚝샘 2010. 6. 5. 01:14

살림의 경제학
카테고리 경제/경영
지은이 강수돌 (인물과사상사,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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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돌 교수는 조치원의 작은 마을의 이장이다. 생태적인 삶을 원하고 있던 차에 직장을 조치원에서 얻게 되어 학교 근처 작은 마을에 자리를 잡았고, 아파트 건립 반대 운동에 참여하면서 주민들의 뜻에 따라 이장이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생태적인 삶을 사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 그가 사람도 살리고, 자연도 살리는 경제학에 대한 얘기를 풀어놓았다.

인상적인 부분들을 발췌해 본다.

돈벌이 위주의 경제구조가 파괴하는 7가지 인간적 조건
1. 공동체와 개인의 분리
2. 생산수단과 노동력의 분리
3. 구상과 실행의 분리
4. 삶터와 일터의 분리
5. 자연과 인간의 분리
6. 생산과 소비의 분리
7. 내면과 외면의 분리
이 중 '2. 생산수단과 노동력의 분리'와 '3. 구상과 실행의 분리'가 낯설게 보이는데, 둘다 모두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가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동자를 통제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낳고 있다. 자본가는 자본가의 임무(구상, 경영)를 다하고, 노동자는 노동자의 임무(실행, 생산)를 다하면 세상은 편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은 원래 그런 것이 아니었다. 원래는 위의 분리된 것들이 분리되지 않고 조화롭게 유지되었는데, 산업화되면서 이런 것들이 분리되었다. 자본의 이익을 위해서...

생산성 향상의 방법은 세 가지이다. 첫째, 투입이 일정하다면 산출을 늘리는 것, 둘째, 산출이 일정하다면 투입을 줄인 것이다. 셋째, 투입은 줄이면서 산출을 늘리는 것이다. 이것은 앞의 두 가지 방법을 동시에 쓰는 것인데, 사실상 현실에서는 세 번째 방법이 지배적이다. 그러면 이 생산성 향상 방식들은 과연 얼마나 '생산적'일까? 이들 방법은 개별 자본의 '돈벌이' 관점에서는 모두 다 생산적이겠지만, 인간의 '삶의 질' 관점에서는 대부분 파괴적이다. 건강과 여유, 인격 존중과 평등, 공동체, 맑은 공기와 물 등으로 표현되는 '삶의 질' 관점에서 보면, 현재의 생산성 향상 방식은 약 20% 정도만 '건강한 생산성'이다. 그것은 관료주의나 부정부패, 낭비 요소를 없애고 힘들고 위험한 노동에 기술을 잘 활용하고 사람들이 여유를 찾게 하는 것이다. 그 외 나머지 80% 이상은 '파괴적 생산성'의 향상이다.
생산성을 나눠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지식채널e에서도 관련 내용을 본 것 같다. GDP에는 범죄가 많아져서 보안산업의 생산성이 높아지고, 아픈 사람이 많아져서 병원과 제약회사의 수익이 늘어나고, 전쟁을 위한 무기 판매를 많이 해야 수익이 높아지는 것이 다 포함되어 있다고... 그러나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편안함과 삶의 여유는 GDP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기업과 사회'라는 강의에 등장하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 회피방식에는 크게 '3D 전략'이 있다. 바로 부정(Deny), 지연(Delaya), 지배(Dominate) 전략이다. 부정 전략은 사태의 발생에 대한 사실이나 책임을 부인하는 것이다. 지연 전략은 책임은 인정하되 그 해결이나 예방은 아직 시기상조라며 시간을 끈다. 지배 전략은 상황과 담론 자체를 교묘한 방법으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고 가면서 본질적 문제해결이 아니라 피상적 해결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손해를 감수하는 해결이 아니라 그 와중에도 오히려 이익을 보는 해결법을 찾는다.
나는 여기에 다음 세 가지를 덧붙여 '6D 전략'이라 한다. 바로 왜곡(Distort), 기만(Deceive), 분할(Divide) 전략이다. 왜곡 전략이란 문제 상황을 비틀어 본질이 아니라 현상의 문제로 치환하는 것이다. 기만 전략은 전문가 회의 등을 통해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준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뇌물, 감투, 암약 등을 통해 민주주의를 기만한다. 분할 전략은 일부 문제제기자들을 고립시켜 특별 관리함으로써 갈등의 확산을 막고, 일부 '희생양'을 철저히 압살시켜 나머지 사람들이 공포감 때문에 연대 행동을 하지 못하게 막는다.
이익을 위한 기업들의 철저함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니.... 확 와닿는 내용인데, 정말 화난다. 강수돌 교수는 이런 기업들의 전략과 전술을 알지 못한다면 시민사회도 자본의 논리에 빠져서 건강성을 잃을 수 있다고 한다.
 
"자치란 국가권력에 대한 불복종이지요. 세금 꼬박꼬박 잘 내주니까 국가 권력은 쉴 새 없이 길이나 닦고 생태게나 파괴하고 주민 억압 기구만 키워가는 것 아닙니까? 복지사회를 위한다는 보험제도도 나는 온몸으로 저항합니다. 바로 마을의 자치공동체를 살리는 것이 진정한 복지사회인 거예요. 남이, 힘센 자가 시혜로 해결해 주는 것은 복지가 아닙니다. 내가 지금 노인이다 보니 국가와 사회의 노인복지에 대한 요즘시각에 민감합니다. 노인을 부양할 젊은 인구는 줄어드는데 노인인구가 늘어나서 문제라는 것 아닙니까? 젊은이한테 부양해달라는 노인이 어디 있어요. 공동체 시절에 노인은 죽는 날까지 일합니다. 우리 아버지도 돌아가시기 1주일 전까지 밭 매셨어요. 뭘 젊은 사람이 보장해줍니까. 오히려 노인들이 죽는 날까지 도시에 사는 자식들 뒷바라지하고 있지. 노인을 실버타운 같은데 수용해놓는 것이 무슨 복지입니까. 그건 수용소입니다. 노인만 따로 시설에 모으고, 장애인은 장애인들끼리 모으는 것은 격리, 수용입니다. 그것을 이용해서 국가권력이 인간 삶의 구석구석까지 지배하는 거예요. '요람에서 무덤까지'는 사회복지의 이상이 아니라 사람이 죽을 때까지 국가권력이 개인의 삶을 장악하고, 지배하겠다는 거예요. 이건 당시의 공산주의국가에 대응하기 위한 시장자본주의국가의 음모예요. 옛날 공동체에는 한 살부터 90살 노인, 미치광이, 장애인이 다 있었어요. 소외시키지 않고 다 감싸고 살았어요. 굶어 죽이지 않고 같이 살았어요. 그게 자치적인 복지죠. 그것을 국가에서 전부 독점적으로 해결해주겠다는 것 아닙니까?"
대구한살림에서 이루어진 인터뷰에서 나온 얘기이다. 나는 해보지 않았던 복지에 대한 새로운 생각으로 여겨진다. 국가가 아니라 공동체가 대안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또하나의 문화의 조한혜정 교수의 생각과 많이 비슷한 것 같다. 마을 단위로 사회안전망을 확충하여 삶의 질을 확보하자는 것. 아까 얘기한 공동체와 개인의 분리, 삶터와 일터의 분리가 가장 문제인 것 같다.

원래 "자유를 잃은 자들의 행위"를 일컫던 '노동'이 프로스테스탄트의 세례를 받음으로써 '구원'의 상징으로 그 의미가 왜곡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의 은총을 받기 위해 그 성공의 열매를 즐기기보다는 검약, 절제, 엄숙, 고난, 경건 속에 인내해야 하고 자기 노동의 대가를 다시금 새 노동의 출발점으로 만들어 추상적인 부를 부단히 축적해야 했다. 결국, 근대 자본주의 노동이란 삶의 구체성 대신 추상성, 유용성 대신 상품성, 자율성 대신 타율성, 인간성 대신 효율성, 주체성 대신 적응성, 느긋함 대신 강박성, 현재성 대신 미래성, 호혜성 대신 경쟁성 등을 추구하기에, 한마디로 인간 행위에 '장애'가 온 셈이다.
우리가 하는 노동이 신성하다고 하는데, 그것이 얼마정도는 왜곡되어 있다는 얘기이다. 그래서 노동 자체를 반대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한다. 일을 하지 않는다고? 그건 아니고, 농경사회의 노동에서 자본주의 노동으로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에게 일어난 변화를 보고 얘기하자.

농경사회에서의 생산 목표는 추상적인 목적(돈벌이)가 아니라 '향유'와 '여유로움'이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노동 세계에서 '능동적 인간 활동'은 '시간 절약' 내지는 '시간 관리'의 대상이 되어 효율성의 지배를 받는다. 따라서 노동은 그 자체의 리듬을 잃고, 오로지 무한 이윤을 추구하는 추상적 기계의 톱니바퀴로 변하는데,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자동주의, 반복 강제, 회피 메커니즘, 경직성 등을 자신의 2차적 본성으로 내면화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자들은 자신의 삶의 목적이던 여유로움을 즐기기는커녕 오히려 '게으름'으로 비난하게 된다.
우리의 게으름은 사실 죄가 아니었다. 그건 본능이었고,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를 관리하려고 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우리의 게으름을 죄악시 한 것이다. 지각하는 학생들을 다시 봐야 하지 않을까?
아까 노동에 대한 반대로 일을 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했는데 이제 그 얘기를 해보자.

돈, 가치, 노동 범주와 "긍정적으로 결별"하는 것, 돈벌이를 위한 노동력의 사용을 지양하는 것 등 "탈가치화" 운동은 유토피아적 공상이 아니라 진정한 삶을 추구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이제 우리는 "지원과 연대 속에서 서로의 욕구를 조정"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또 자신의 처지에 대한 책임을 다른 존재에게 돌리려는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나는 더 이상 노동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건 불필요하기 때문이지요. 나는 다만 필요한 것만을 원할 권리가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에 대한 대안은 아무 일도 않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의미 있는 작업과 영향을 넓혀 나가는 것이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정신으로 충만한 활동이기 때문이다.
구별하자. 노동에 대한 거부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지 않은 일을 하지 않는 것. 즉, 필요하지도 않으면서 이익이 되기 때문에 하는 노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말은 멋있는데, 우리 삶에서, 교사니까 학교 현장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은 뭐가 있을까?
마지막으로 강수돌 교수가 살림의 경제를 얘기하는 이유가 나온다.

돈벌이 패러다임이란 너도 나도 돈을 많이 벌어 만힝 소유하고 많이 소비함으로써 행복해지자,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노동하자, 뭐 이런 것이다. 그런데 1960년대 초에 1인당 국민소득이 80달러 수준이던 나라가 2007년 말에 2만 달러를 달성했다면 충분히 부자가 된 것 아닌가? 우리가 신경을 더 써야 한다면 빈부 격차와 생태 파괴가 심해지는 현실을 고쳐 두루 잘 살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다. 그런데도 아직도 정부는 허리띠를 더 졸라매 파이를 더 크게 만들어야 한다며 '747 공약'에 강박적으로 집착하고 있다. 대체 7%의 경제성장,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세계 7대 강대국이란 목표는 무엇을 위한 목표란 말인가?
다른 건 몰라도 이것 하나만 물어보자. 도대체 1인당 국민소득 몇 만 달러가 되어야 한 나라의 지도자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할까? "국민 여러분, 정말 수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파이를 크게 만드느라 잠 못 자고, 하고픈 공부 못하고, 아이들과 대화할 시간도 없이 빡세게 일하시느라 그 얼마나 스트레스 받으며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자, 이제는 우리도 잘살게 되었으니, 오늘부터 정말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아가십시다. 하루에 일도 서너 시간만 하고, 나머지 시간엔 자기가 좋아하는 일만 하며 아이들이나 이웃과 즐겁고 행복한 삶을 꾸려나가시길 빕니다"라고 말이다. 과연 이런 말을 들을 날이 올 것인가? 아니다. 꿈 깨자. 단언하건대 지금의 경제 패러다임 안에서는 그런 날이 오지 않는다. 지금의 경제 패러다임은 끊임없이 목표치를 상향 조정하고 국민을 생산성 향상 게임에 동원해야지만 겨우 유지될 수 있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정말 그런 지도자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기업가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경제가 어렵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항상 경제가 어려웠고, 고통은 힘없는 사람들만 짊어졌으며, 분배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가 기다리는 행복한 날은 현재의 상황에서는 오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우리가 얻은 권리와 가치들이 언제 기다려서 주어졌던가?

노동에 대한 생각, 복지에 대한 생각, 돈벌이 경제에 대한 생각들을 다시 해볼 수 있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