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간의 접속/건축

[책 4] 건축이란 무엇인가: 건축가의 사유

뚝샘 2025. 1. 27. 17:39

책이름: 건축이란 무엇인가
곁이름: 우리 시대 건축가 열한 명의 성찰과 사유
지은이: 승효상, 정기용,  조성룡, 김인철, 김영섭, 민현식, 이종호, 김준성, 김종규, 이일훈, 김영준
펴낸곳: 열화당
펴낸때: 2005. 12.

월간 미술이라는 잡지에 건축가들이 성찰하고 사유한 건축에 대한 좀 무거운 연재 글을 모은 책이다. 여러 사람이 쓴 글들이라서 글의 너비와 깊이, 방향과 대상, 의도 등도 다르다. 어떤 글은 건축 일반에 대한 글도 있고, 건축 개념에 대한 글도 있고, 건축 작업에 대한 글도 있고, 건축과 사회의 모습을 연관시켜서 비판한 글도 있고, 건축이 담고 있는 철학에 대한 글도 있다. 그래서 글을 읽을 때 좀 산만한 느낌도 있었다. 재미라도 있으면 몰입할 수도 있었을텐데, 재미있는 글도 아니라서 몰입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 중에서 인상적인 부분들을 발췌해 보았다.

먼저 김인철의 글 중에서 장소의 의미를 언급한 부분인데,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에서 근본적인 의미를 이끌어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길지만 인용해 본다.

공간의 시원인 땅은 건축이 개입함으로써 장소성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자연으로서 땅은 이미 장소이지만 인간의 의지-건축으로 장소의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건축은 건물이라는 구체적인 형태가 아니라 그 땅에 대한 건축적인 해석이다. 한 개의 기둥, 한 칸의 방이라도 그것이 건축의 의지라면 그것만으로도 장소의 의미가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땅을 만지고 땅을 다루는 것은 건축으로 땅을 점유하는 것이라기보다 땅과의 관계를 만드는 것이어야 옳다. 공간인 건축의 의미는 건축을 담고 있는 장소(땅)가 포함되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건축한다는 것은 땅을 장소화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장소(a place)'를 '그 장소(the place)'로 만드는 것이다. 장소성은 건축으로 비롯되지만 그 의미의 완성은 그곳에서 영위될 일상에 의해 완성된다. 새삼스럽지만 공간은 인간의 삶을 존재하게 하는 원초적인 조건이다. 그곳에서 이어져 나갈 시간과 일상으로 기억이 쌓이고 그것을 공유하게 되는 가치가 만들어지면 땅과 건축으로 빚어진 공간은 그 형상이 어떤가에 관계없이 그곳만의 성격을 갖는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곳, 유일한 곳이 되기 때문이다. 같은 곳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은 그곳이 다른 곳과 다른 존재라는 차이를 갖는다. 차이는 곧 그곳만의 독특함이자 정체성이다. 그곳만의 시간이 있으며, 그곳만의 공간이 있으며, 그곳만의 기억이 있으며, 그곳만의 가치가 있다. 그것은 문화라 불리는 현상의 아주 작은 시작이다. 문화는 표어처럼 구호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집적으로 만들어지는 현상이다. 그 시작이 건축으로 비롯된다면 건축은 문화를 생산하는 작업이어야 한다. 건축은 일상을 의미있도록 하고 땅의 가치를 장소로 번역하며 공간으로 시간의 영속성을 담아내어 이 시대와 이 땅에 흔적을 만드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문장이 인상적이다. 앞에 했던 말들을 집약해서 건축은 흔적을 만드는 것인데, 그 흔적에는 일상이 있고, 영원한 가치가 들어있다는 이야기이다.

이일훈은 건축 설계 방법론을 제시했다. 불편하게 살기, 밖에 살기, 늘여 살기를 묶어서 '채 나눔'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건축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삶은 건축을 압도한다. 어디 삶이 압도하는 것이 그뿐이랴. 삶은 예술도 압도하고 정치도 압도하고 기술도 압도하고 모든 것을 압도한다. 삶을 압도하는 무엇이 있다면 그 무엇은 삶을 병들게 하는 것이다. 아니면 스스로 병들어 있는 무엇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만약 삶을 압도하는 그 무엇이 갈채받고 추앙되고 선호되고 있다면 그 시대와 사회가 병들었거나 병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 무엇도 우리의 삶을 압도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렇게 보면 건축은 삶보다 뒤에 있으되 '삶의 그릇'이라는 기능으로 - 그릇이 먼저 있어야 무얼 담을 테니 - 압도가 아닌 앞서 걸어야 되는 숙명에 있다. 아니 건축은 삶을 앞서 뒤따라간다.


마지막 문장은 역설적이다. '앞서 뒤따라간다'는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앞의 내용을 읽어보면 수긍이 된다. 그 안에 울림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 쓴 건축가들의 이야기를 우리보다 조금 더 많이 아는 누군가가 해설을 해주거나 건축가들과 이 내용으로 대담을 했다면 좀 더 이해하기 쉬웠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