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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19]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 교회다운 교회를 찾아서

뚝샘 2016. 4. 9. 20:00

책이름: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

지은이: 김두식

펴낸곳: 홍성사

펴낸때: 2010.01


요새들어 종교에 대한 관심이 생긴다. 내가 읽은 책들을 보면 종교 관련 책은 거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서서히 읽어야 되는 분야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도서관에서 우연히 본 책이고, 지은이가 그래도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선택하게 되었다. 특히 한국 기독교의 문제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일반인의 상식과 기독교인의 상식을 적절히 안배하여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도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얘기 중에서 교회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된 것들도 많이 있는데, 그 중의 몇 가지를 뽑아보았다.


담임 목사님의 권력은 날로 강해지는 데 반해, 부목사님들의 인생은 갈수록 초라해집니다. 해마다 얼마나 많은 부목사님들이 교회를 거쳐 가셨는지 교인들은 이제 기억도 못할 지경입니다. 파리 목숨에 가까운 부목사님들의 슬픈 해직 스토리에 교인들도 상당히 익숙해졌습니다. 누구는 실세 장로님에게 찍혀서 일 년을 못 넘기고 잘렸다더라, 누구는 담임 목사님 사모님에게 밉보인 것이 결정적인 해직 사유라더라 하는 사연들이 들려오지만, 교인들은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담임 목사님보다 설교를 더 잘하여 교인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부목사들에게 자살행위와 같습니다. 설교 잘하고 교인들에게 인기가 높다는 소문이 회자되는 순간, 젊은 부목사는 해직 1순위로 올라서게 됩니다. 그렇다고 부목사님들이 독립해서 새로 교회를 개척할 마음을 먹기도 힘듭니다. 이제 한국 교회 신자들은 더 이상 개척 교회를 선호하지 않습니다. 개척 교회를 다니면 받게 될 교회 건축 등의 압력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에 요즘은 누구라도 개척 교회보다는 자리 잘 잡은 대형 교회를 선호합니다.


부목사들의 형편이 이렇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내 친구 중에도 목사님이 있는데, 그 친구는 어떤지 궁금하기도 하다.


기독교가 국가의 안보나 이런 것에 왜 그렇게 집착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는데, 이런 것에 대한 대답이 기독교의 역사에 있었다. 바로 로마시대의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부터 이런 경향이 생긴 것이다. 그 이전에는 국가가 어떻게 되든 말든 상관 없었다. 박해와 두려움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국가권력의 위치에 서게 됨에 따라 국가 방위 또는 통치에 대한 책임의 상당 부분을 공유하게 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 교회 자체에도 지켜야 할 것이 갑자기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우선 국가로부터 돌려받은 재산도 지켜야 했고, 교회 위계질서 내의 신분도 지켜야 했습니다.


한마디로 국가의 통치에 힘을 보태면서 가진 것이 많아졌기 때문에 국가의 안위에 집착하는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가진 것이 많으니까.... 이런 교회의 변화를 여기서는 콘스탄티누스주의라고 하는데, 교회답지 못한 교회를 만든다고 말한다. 이에 대한 비판을 좀 인용해본다.


콘스탄티누스주의는 교회를 왜곡시켰습니다. 대량 개종은 목숨을 걸고 예수를 믿기로 결심했떤 과거의 신자들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기독교인들을 양산합니다. 근본적으로 세상 사람들과 분명히 구별되는 생활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주의는 교회를 세상 공동체와 다를 바 없는 상태로 변질시켰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모든 사람이 당연히 국가-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시스템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교회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맏는 '구별된 사람들'의 공동체여야 합니다. 출생과 동시에 전 국민이 자동적으로 기독교인이 되는 공동체는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신앙 고백도 요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세속과 구별되는 공동체이다. 이 사실을 처음 알았다. 원래 교회가 세상 속에 있으니까 어느정도 세속화 되어 있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원래 교회는 그런 것이 아니었단다. 


그리고 인상적인 내용도 좀 뽑아보았다.


대형 교회에서 담임 목사를 세습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 희한한 논리로 반박하는 내용이 있는데, 너무 어이가 없어서 옮겨본다.


왜 세습이라는 용어를 쓰느냐, 북한 김일성한테나 쓰는 말을 어떻게 교회에 가져다 붙일 수가 있느냐? 그런 표현을 쓰는 것 보니 당신 사상이 의심스럽다. 시골의 조그만 교회에서 후임자를 찾지 못해 아들에게 목사직을 물려주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도 세습이라고 욕할 거냐? 목사란 원래 주의 종으로 철저한 봉사직인데, 그 자리를 물려주는 것이 부귀나 권세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교히 내부 사정도 모르는 놈들이 무슨 말이 그렇게 많으냐? 대형 교회일수록 내부 사정이 복잡하여 교회를 창립한 목사님이 은퇴하시고 나서 외부에서 담임 목사를 초빙하면 교회에 혼란이 올 수 있기 때문에 아들 목사님을 통해 그런 일을 예방하자는 것인데 뭐가 문제냐? 교회 내부의 의사 결정 과정도 모두 거쳤다. 미국의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도 아들에게 조직을 물려주었는데, 그걸 보면 세습은 세계 보편적 현상이기도 하다.


이정도 되면 상식이 무엇인지 의심스럽게 된다. 같이 말을 못할 수밖에 없다. 


직장을 선택하거나 대학을 선택하거나 결혼을 선택하거나 선택의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에게 기도한다.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옳은지 대답해달라고.....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기도에는 응답을 안 하신다고 한다.


 성경 인물 중 누구도 어떤 직장을 갖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신분 변화가 자유롭지 못했던 성경의 시대에 비해 현대 사회에서는 직장이 많아지고 선택이 자유로워졌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는 것은 어떤 직장을 가야 내가 행복할지를 점치는 식으로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떤 직장을 가라는 식으로 좀처럼 분명히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표적을 통해 그 길을 보여 주는 일도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그런 응답들은 대개 민족을 살리거나 교회의 운명이 달린 특별한 경우에 주어진 것입니다. 혼자 비전을 갖는 것이 위험한 만큼이나 혼자 예언이나 표적을 받는 것도 위험한 일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고민 끝에 어렵게 결정하는 일을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 한 방으로 뚝딱 해결하려는 것도 교만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은 대부분 예언이나 표적보다 훨씬 선명한 방식으로 이미 계시되어 있습니다. 어디서 그걸 알 수 있느냐고요? 바로 성경에서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늘 갈등하면서 기도하면서 응답을 기다리는데, 하나님이 볼 때 응답할 필요가 없는 것 같다. 성경에 다 쓰여 있는데 그건 안 보고 기도만 하고 있으니 좀 답답하실 것 같기도 하다. 


기독교인들의 불관용도 지적한다.


문제는 언제나 종교적 불관용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다른 종교, 다른 교파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공격성은 변함이 없습니다. 16세기에 주로 화형이나 학살로 상대방을 처리했다면, 오늘날에는 말이나 글로 상대방의 영혼을 죽이지 못해 안달합니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상대방의 목숨을 뺏는 데 주저 없이 나서리라 생각되는 기독교인을 찾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상대방과 자신이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훨씬 많다는 것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 이어서 지은이는 마지막 부분에 기독교인들이 서로 대립할 때 하나님은 누구의 편에 서실지를 생각해 본다고 말하고 있다.


창검을 손에 든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들이 자신들의 승리를 기원할 때 하나님은 누구의 편을 드셔야 했을까요?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독교인들을 죽이는 현장에서 예수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중략) 이런 폭력이 하나님의 이름 아래 자행된 것은 '나는 언제나 정의의 편'이라는 확신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나의 편'이라는 확고한 믿음은 기독교인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근원인 동시에 남을 해칠 수 있는 위험한 생각이기도 합니다. 


종교적 불관용은 종교적 확신에서 나오는 것 같다. 하나님은 나의 편이고 너의 편이 아니니 너는 틀렸다는 생각말이다. 종교적 확신도 적당히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러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기독교인들을 얘기하면서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 교회 간판을 단다고 다 교회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런 말들은 기독교인들에게 뼈아픈 부분이 될 것 같다.


그 다음에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한다.


쪽방에 사는 분들, 노숙인, 새터민, 장애인을 위한 지원에 많은 돈을 쓰고 있는 '그나마 괜찮은' 우리 교회에서 제가 느낀 또 다른 불편함은 우리 교인들 중에 쪽방에 사는 분들, 노숙인, 새터민, 장애인이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물론 시각장애인이 몇 분 계시기는 하지만, 우리 교회는 기본적으로 쪽방에 사시는 분들, 노숙인, 새터민, 장애인들과 함께 지내려는 의지가 부족한 공동체였습니다. 필요한 곳에 돈을 보내고 여러 가지 사업이 진행되기는 했지만, 그분들을 우리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은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우리' 교회와 우리가 돕는 '그분들' 사이에는 늘 보이지 않는 장벽이 존재했습니다. '그분들'의 세계를 방문하기는 하지만, 그분들이 '우리' 세계로 들어오기란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교인들 모두 부자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물질을 나누어 주자는 메시지는 있었지만,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자는 메시지는 없었습니다. 조금 나눠 주고 더 부자가 되더라는 메시지는 있었지만,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사는 공동체를 만들자는 메시지는 부족했습니다.


이 이야기가 기독교인들에게는 더 뼈아플 것 같다. 약자들을 타자로서 도와주기는 하지만, 그들을 같은 공동체 안에서 함께 하려고 하지 않는 이중적인 모습에 대한 얘기는 교회다운 교회를 생각할 때 분명 뼈아픈 얘기이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이다.


마지막으로 교회답지 않은 교회의 모습으로 실험하지 않는 교회를 얘기한다.


현대 교회는 예수님을 따르는 실험을 포기함으로 외형적인 평안을 얻었습니다. 자기 재산을 나누는 일도 없고 남을 신뢰하는 일도 없기 때문에, 배신당할 일도 없고, 누구와 다툴 일도 없고, 용서할 일도 없습니다. 겉으로 보면 지극히 평안해 보이지만, 이건 샬롬이 아닙니다. 그저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끼리 모여 사교를 나누는 친목 단체일 뿐입니다. 영화관 관객 수준의 상호 관계를 유지하면서 교회라고 뽐내고 있는 셈입니다. '그나마 괜찮은' 교회가 매년 엄청나게 많은 예산을 가난한 이웃을 위해 쓴다 하더라도 결코 자랑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답지 않은 교회, 지은이는 영화관과 교회가 똑같다고 말한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앞에서 하는 얘기나 영상물, 노래 등을 듣고, 다시 그냥 돌아가고.....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소통하지 않고, 실천하지 않는 모습에 대한 비판이다.


그의 결론은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실험하고, 세속적인 공동체와는 다른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역시 문제는 실천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