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간의 접속/문학

[책 80] 갈팡질팡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뚝샘 2012. 12. 5. 08:43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저자
이기호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2-07-31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1999년 ≪현대문학≫에 단편소설 ≪버니≫로 등단한 이기호 작가...
가격비교

 

이기호 소설집을 봤다. 성석제와 비슷한 문체로 가벼움과 아이러니로 이야기를 버무리고 있다. 비루하다. 한심한 것도 아니고 불쌍한 것도 아니고 비루하다. 각각의 단편들을 살펴보며 이야기를 풀어보자.

 

「나쁜 소설」은 부제처럼 소리내어 읽어주는 소설이다. 서술자가 구어체로 말하는 소설이다. 원래 소설이라는 것이 발생했을 시기에는 소설을 읽어주는 사람이 있어서 작가의 생각에다 읽어주는 사람의 생각이 합쳐지고, 독자들이 공유하는 방식으로 유통이 되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흥미가 있다. 특히 처음에는 최면을 거는 것처럼 도입을 설정하고 이야기를 전개하다가 본격적으로 이야기에 들어갈 때에 독자의 시점을 주인공의 시점으로 일치시켜서 2인칭 '당신'이라고 하면서 독자(나)의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다. '나쁜 소설'이라고 말하면서 독자들에게 생각할 수 있는 '착한 소설'이라는 점에서 아이러니 기법이 재미있다.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은 요리 소개 프로그램을 차용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이야기는 당연히 흙을 먹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흙을 먹는다고? 그게 가능한가? 실제로 가능한가를 따질 필요는 없고, 작가의 상상력 속에 담겨 있는 주제 의식을 봐야겠다. 간첩을 무서워하는 주인공이 소심한 군인 아버지가 파놓은 지하 벙커에서 흙을 먹었고, 커서도 파주로 이사하여 흙을 먹다가 간첩으로 몰리는 이야기인데, 이렇게 얘기하면 무슨 말인가 싶겠다. 아무튼 불통과 가난 등의 생각들을 기발한 상상으로 쓴 것이다.

 

「원주통신」은 소설가 박경리의 이웃집에 살았던 주인공이 봉변을 당한 이야기인데, 어렸을 때 박경리 이웃에 산다고 자랑한게 친구들 사이에 친하다고 소문이 났고, 커서 조폭 사장이 된 친구의 협박을 받아 박경리의 각서를 받아야 하는 곤란한 처지에 놓인 것이다. 이 소설도 줄거리를 써놓고 보니까 이게 뭔가 싶은데 아무튼 그렇다. 그 가운데 주인공이 겪는 불안감이 잘 드러나 있다.

 

「당신이 잠든 후에」와 「국기게양대 로망스」는 맨손으로 상경한 백수가 자해공갈단 하다가 실패하고, 태극기 훔치려고 국기게양대에 올라갔다가 훔치지도 못하는 못난 이야기이다. 상황들도 참 비루하다. 이 소설집 속의 주인공들 중에서 가장 비루하다.

 

「수인」은 소설가가 은둔해서 소설을 쓴 후 세상에 나와보니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하여 국가는 없어지고, UN의 관리 하에 온 국민이 외국으로 이주하는 이야기이다. 소설가를 필요로 하는 국가가 별로 없어서 좌절하는데, 정말 소설가라면 출판된 책을 교보문고에서 가져오면 외국에 갈 수도 있다는 말에 시멘트로 막힌 교보문고를 곡괭이 노동으로 파낸다. 물론 비현실적인 상황인데 이 소설 속에서는 소설가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물음이 들어있다. 한마디로 소설가란 노동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고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술하는 사람이 아니라 노동하는 사람이다. 결국 소설가는 노동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서 외국으로 이주를 허가 받지만 정말 가는지 안 가는지 명확하지 않다.

 

「할머니, 이젠 걱정 마세요」는 모노드라마 연극 같은 소설이다. 실제로 방안의 조명들이 무대장치의 조명처럼 묘사되기도 한다. 할머니는 치매 같은 병에 걸린 것으로 여겨지고, 술 취해서 들어온 글쓰는 손자인 나는 할머니를 위해서 같이 누워서 이런 저런 말벗이 되어 주는 것이다. 할머니가 늘 하는 레퍼토리인 전쟁 때 고생한 이야기들을 하게 하는데, 우연찮게 이전에 얘기하지 않았던 7살도 안 된 어린 조카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조카의 부모, 즉 할머니의 동생네 가족들이 모두 빨갱이로 몰려 산으로 들어갔다가 몰살당하고, 어린 조카가 두려움에 떨어 찾아 왔을 때 이모인 할머니는 그 조카를 처음에는 숨겨주지만 결국 들켜서 죽음에 이르게 한다. 할머니의 잠재의식 속에 들어있는 진한 죄책감이 아프게 다가오는 소설이다.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는 소설집 제목인데 이 소설집의 제목이 어떻게 해서 지어졌는지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소설을 쓰고 있다. 그런데 내용 상으로는 특별한 점이 안 보인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나쁜 소설」,「수인」,「할머니, 이젠 걱정 마세요」가 괜찮았다. 무겁지 않은 이야기들이 재미있었고,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