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간의 접속/문학

[책 19] 이만큼 가까이: 다층적인 시선과 쿨함

뚝샘 2025. 6. 26. 15:41

책이름: 이만큼 가까이
지은이: 정세랑
펴낸곳: 창비
펴낸때: 2021.08.

정세랑이 2013년에 창비장편소설상을 받은 작품이고, 이 책은 개정판이다. 이전에 읽었던 정세랑의 작품처럼 여러 인물들의 다양한 상황과 정서를 감각적이면서 세련되게 그리고 있다. 인물들에 대한 시선이 끈적이지 않고 쿨하다. 사람이 죽는 엄청난 사건마저도 담담하다. 그래서 더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이야기는 나와 친구들의 성장기를 포함한 추억담이다. 내가 예전에 찍었던 비디오 테이프를 돌려보며 추억담을 이야기하는 구성이다. 친구 영상 보여주고, 그 친구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할머니나 부모님 영상 보여주면서 자기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그냥 풍경을 보여주면서 다른 친구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영상과 이야기가 완전히 유기적으로 맞아 떨어지지는 않지만 분위기는 얼추 맞는다.

나는 미술과 디자인을 공부하다가 영화 미술을 한다. 영상에도 관심이 있어서 영상도 찍고 편집한다. 친구 주연의 오빠인 주완에게 관심을 갖다가 주완과 사귄다. 주완이 수미의 동생인 수호가 쏜 총에 맞아 죽자, 주완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증세로 혼란을 겪기도 하였다. 영화 미술로 일할 때 알게 되었던 로케이션메니저와 사귀고 동거를 한다. 그와는 잘 통하지 않아서 적절히 거리감을 둘 수 있어서 담담하게 만날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친구들을 찍은 영상을 주연이 편집하여 단편영화제에 응모하여 수상하여 단편영화 감독으로도 영화를 찍고 제작도 한다.

송이는 재봉과 패션에 관심이 많았고 항공운항과를 진학하여 승무원으로 일했었다. 뉴욕에 이민 갔던 언니가 교통사고가 나자간병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진짜로 사직하고 뉴욕으로 간다. 간단한 언니 심부름만 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아서 공원 등지에서 틈틈히 뜨개질을 하다 우연히 로컬 디자이너를 만나 그의 샵에 취직했고, 비자를 바꾸기 위해 디자인 스쿨 등록하고 공부도 한다. 이후 큰 니트기업으로 이직하고 폴랸드 남자 필립과 사귄다. 가끔 한국에 들어와서 친구들을 만난다.

수미는 동생 수호와  양계장을 하는 할머니네 집에서 할머니와 삼촌과 산다. 엄마는 어쩌다 온다. 민웅을 사랑해서 늘 민웅을 쫓아다니지만 민웅은 유진과 사귄다. 쓰기 중독이 있어서 친구들에게 시시콜콜한 내용의 편지나 쪽지를 쓰고, 나중에는 SNS도 많이 쓴다. 수호가 탈영병이 버린 총을 발견하고 사용하다 주완을 죽이는 일이 벌어지고, 가족은 흩어지고, 수미는 감호소로 간다. 후에 서울 서북부의 여성센터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한다.

민웅은 과수원 집 아들로 과수원 일을 도와드리다가 물려받아서 한다. 달리기를 못하는 이유진과 함께 달리면서 마음을 얻어서 사귀다가 헤어진다. 수미를 때리는 수미 삼촌을 수미를 대신해서 복수하기도 한다. 이삿짐 센터에서 일하던 사촌형이 사다리차에서 떨어져 죽은 후 무기력하기도 했지만, 조경 회사에 취직한 후로 다시 일상을 찾아 생활한다.

찬겸은 친구들 중 가장 공부를 잘하고, 버스에서도 항상 공부를 한다. 고등학교 입시는 지나친 긴장으로 실패하여 자신의 실력보다 못 미치는 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대신 친구들과 함께 다닐 수 있었다. 고등학교 때는 줄곧 우등을 놓치지 않고, 결국 치대에 입학했고, 치과 의사가 되어 페이닥터로서 전국을 돌아다닌다. 어렸을 때의 귀여운 외모는 없어지고 훈남이 되자 여자 보는 눈이 높아져서 여러 여자들을 헌팅하지만 제대로 된 연애는 하지 못한다.

주연은 인도에서 살다가 왔다가 파주로 새로 이사 왔다. 음악과 책에 관심이 많고, 새로 파주에 지은 집은 굉장히 길고 큰 책장이 있어서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대학 졸업 후 출판사에서 일을 하다가 3개월 해외출판연수 기회가 얻었으나 회사가 휴직을 안 시켜줘서 사직하고, 연수를 유럽에 다녀온다. 연수 가기 전에 집은 팔고, 연수 다녀온 후에는 기획 협동조합의 일원으로 출판, 미술, 영상, 기타 문화 기획 관련 이을 하면서 지낸다.

주완은 주연의 오빠로 영화에 관심이 많다. 학교는 다니지 않고, 떠돌이개들을 돌본다. 나와 영화를 자주 보면서 사귀게 되었다. 떠돌이 개를 돌보다 수미 동생 수호의 총에 맞아 죽는다.

 

위의 인물들의 이야기들이 산만하게 시간과는 무관하게 제시되고 있다. 소설의 세부적인 내용 중에서 줄거리와는 크게 관련이 없어도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어서 발췌해 보았다.

 

먼저 주완이 죽기 전에 개와 함께 눈 덮인 들판에 있는 장면을 묘사한 부분이다.

선과 면으로 풍경이 있고, 점 두개로 하주와 큰개가 있다. 씻기 전인 큰개는 짙은 회색 점이다. 두 점은 별로 움직이지 않다가 그 소리가 들리자 둘이 함께 조금 커졌다 작아진다. 먼 곳에서부터 실려 온 폭발음이었다. 귀가 움찔 움직이는 것과 비슷하지만, 그보다는 둘의 가장자리가 바깥으로 살짝 밀려났다가 다시 말려든 것에 가깝다. 온몸으로 소리를 들으면 그렇게 되듯이.
시점은 멀리멀리 있다. 두 점이 움직이는 걸 볼 수 있을 만큼 간신히 거리를 유지한다. 소리를 따라,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직선을 그렸다가 곡선을 그렸다가 하면서 장난을 치고 그 장난을 무시하기도 하면서, 엎드린 생물과선 생물이 함께 걸어간다. 

 

풍경 묘사가 구체적 대상을 추상적으로 묘사해서 독자의 상상을 자극하여 그림이 아름답게 그려진다.


그리고 주연의 집을 팔기 위해 대청소를 할 때 나도 그 집을 청소하는 장면이 있다.

하다보니 욕실에 다다랐다. 내가 욕실에 들어가자 뒤에서 주연이가 뭐라고 만류했으나 문을 잠가버렸다. 주연이는 이 욕실을 사용하지 않는지 솔도 욕조도 말라 있었다. 그때보다 키가 크진 않았지만 욕조가 예전보다 작아 보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여전히 석관처럼 길고 깊었다.
뜨거운 물로 욕조를 닦았다. 맨발에 닿는 감촉이 전과 같았다.

 

욕조를 청소하면서 주완과 함께 목욕을 했던 옛 생각이 떠오른데, '전과 같았다'는 아주 짧은 문장인데도 그 감정에 동화되어 울컥하게 하는 장면이었다. 

마지막에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이야기하면서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있는 듯 없는 듯 살다 간 사람, 있다가 없어진 사람, 있어도 없어도 좋을 사람, 없어도 있는 것 같은 사람, 있다가 없다가 하는 사람, 있어줬으면 하는 사람, 없어져버렸으면 하는 사람, 없느니만도 못한 사람, 있을 땐 있는 사람, 없는 줄 알았는데 있었던 사람, 모든 곳에 있었던 사람, 아무 데도 없었던 사람, 있는 동시에 없는 사람, 오로지 있는 사람, 도무지 없는 사람, 있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사람, 없다는 걸 확인시켜주지 않는 사람, 있어야 할 데 없는 사람, 없어야 할 데 있는 사람..... 우리는 언제고 그중 하나, 혹은 둘  에 해당되었다

 

다양한 사람들의 부류를 '있다'와 '없다'라는 두 단어만 가지고 만들어내는데, 그 말맛이 맛깔스럽게 느껴진다.


읽으면서 분위기나 인물이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서울의 주변 지역에서 비주류 생활에 찌들어 있는 동네 친구들의 이야기라는 점이 그러하다. 단지 전체를 아우르는 큰 이야기는 없다는 점이 좀 다르지만, 그건 이 작품만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친구들의 추억담으로만 말랑말랑하게 전개된던 에피소드가 주완의 죽음으로 한 번 크게 충격을 가하게 되는데, 이러한 전개가 소설을 좀 강하게 이끌고 가는 느낌이다. 중반부터 후반까지 계속 추억담으로 가면 너무 밋밋하기 때문에 후반으로 이끌 수 있는 강력한 에피소드로 주완의 죽음을 가져온 것 같다. 그러면서 이를 위한 장치로 탈영병, 무기를 버렸다는 것, 수호가 탈영병을 찾겠다고 하는 것, 주완의 운동화를 창용과 함께 사러 간 것 등을 배치했는데, 이런 장치들은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 속에서 무심하게 지나쳤던 것들인데, 주완의 죽음으로 재조명되면서 이야기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그리고, 후반부에 주연의 생일 겸 송별회를 위해 주연의 집에 친구들이 모여서 내가 만든 영상을 다 같이 보는 장면에서 산만하게 흩어졌던 친구들의 에피소드들이 하나로 꿰어져서 안정감을 준다. 내가 소설을 읽으면서 이 친구들을 하나하나 머리 속에 그리듯이 이 등장인물들도 그 영상들을 보면서 내가 느낀 느낌들을 같이 느낀다고 생각하니까 이들의 이야기가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가 되는 것이다.

 

정세랑의 소설, 다양한 사람에 대한 다층적인 시선과 무겁지 않은 쿨함이 사람을 끌어당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