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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17] 디자인의 디자인: 디자인 책의 고전

뚝샘 2025. 6. 8. 22:57

책이름: 디자인의 디자인
지은이: 하라 켄야
옮긴이: 민병걸
펴낸곳: 안그라픽스
펴낸때: 2007.02.

내가 디자인에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관심이 많은 것도 아니지만 상식과 교양 수준에서라도 디자인과 관련된 생각은 갖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읽게 되었다. 특히 건축 관련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읽으면서 인상적인 부분을 뽑아 보았다.

먼저 디자인의 발생을 이야기한다. 디자인은 어떤 기능을 위해서 형태가 만들어지면 그것 자체가 디자인이지, 특별히 없던 디자인이 발생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너무 먼 생각이고, 근대적인 산업 사회에서의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발생한 것을 말한다.

사물의 주변에서 숨 쉬고 있던 섬세한 감수성을 짓밟고 나아가려던 기계 생산에 대해 ‘못 참겠다’라고 거친 기세로 이의를 제기했던 대표적 인물이 러스킨과 모리스였다. 그들의 활동은, 난폭하고 서급한 당시의 변화에 대한 경종과 야유였다. 다시 말해 생활 환경을 급격하게 변화시키는 산업의 구조 안에 감추어진 둔감함과 미숙함에 대한 미적 감수성의 반발, 이것이 바로 ‘디자인’이라는 사상 또는 사고방ㅅ힉의 발단이 된 것이다.

결론은 섬세한 미의식이 기계 생산에 의해 파괴되는 것에 대한 반발로서 디자인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기계로 생산되는 상황에서 섬세한 미의식이라고 하는 것을 좀더 세부적인 요소들로 분해하여 새로운 사회에 맞게 만들어낸 집단이 바우하우스이다. 이들은 기존의 장식이나 기교 등에 대해서도 다시 검증을 하였다.

더욱 철저한 사상과 에너지로 이 영양 넘치는 쓰레기 더미를 검증하고 분행하여 사고라는 강력한 절구에 넣어 곱게 다지고 체로 걸러내어 정리한 것이 바우하우스이다. 조형과 관련된 모든 요소를 여기서 일단 감각적, 사색적으로 검증하였고 ‘제로’ 지점으로 환원해갔다. 그리고 더 이상 걸러낼 수 없는 요소로 남은 것이 색채, 형태, 텍스처, 소재, 리듬, 공간, 운동, 점, 선,면 등과 같은 조형의 기본 요소들이다. 바우하우스는 이들 요소를 수술대 위에 깨끗하게 정돈한 뒤 이제부터 새로운 시대의 조형을 시작하자고 소리 높여 선언함으로써 새로운 조형 운동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조형에서 더이상 나눌 수 없는 기본 요소들을 걸러내는 발상이 대단하다. 이것들 하나하나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것들이 조형에서 자기 역할을 하고 서로 조합되어 하나의 이미지와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임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나는 기껏해야 점, 선, 면, 색 정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디자인의 역할을 이야기하면서 디자인이 경제나 테크놀로지의 하인 노릇만 한다는 이야기도 했다. 경제나 테크놀로지가 앞서가고, 힘이 있고, 주도권을 갖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디자인도 근본을 잃지 않고 역할을 해오고 있다고 말한다.

디자인이 경제나 테크놀로지의 하인 노릇만 계속해온 것은 아니다. 그러한 경향의 한편에서는 물건에 형태를 주는 이성적인 지침으로서 착실하게 맡은 바 임무를 다해왔다. 디자인은 ‘형태와 기능의 탐구’라는 이상주의적 사상의 유전자를 깊숙한 곳에 품고 있어서 경제라는 에너지롤 운동하면서도 냉정한 수도자와 같은 일면을 유지해왔다. 산업 사회 속에서 최적의 형태와 환경을 계획해나가는 이성적, 합리적인 지침으로서 역할을 다해왔다. 테크놀로지의 진보가 제품이나 커뮤니케이션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할 때마다 디자인은 싫증 내지 않고 끊임없이 최선의 답을 찾는 역할을 맡는다.

종이와 관련된 전시회를 기획하면서 종이책의 의미를 다시 이야기한다. 요새는 정보가 종이책에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가상의 메모리에 저장되는데, 이것은 더 많은 양을 저장할 수 있다는 효율성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효율성과는 다른 관점에서 종이책의 의미를 찾는다.

오늘날의 종이는 미디어의 주역에서 내려와 실무적인 임무에서 해방된 덕분에 다시 본래의 '물질'로서 매력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분명 책은 일정한 정보를 저장하는 미디어로서는 다소 요란스러운 감이 없지 않다. 무겹고 부피도 크며 때도 많이  타는데다 풍화 작용도 겪는다. 디지털 데이터로 만들어 저장하면  아주 작은 메모리에 쏙 들어갈 정도의 정보가 책만큼 큰 크기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정보가 대량으로 저장되거나 고속으로  이동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정보와 개인의 관계를 냉정하게  통찰한다면 정보를 얼마나 음미할 수 있느냐 하는 요인이 더옥 중요해진다. 책이라는 것을 통하여 적당한 무게와 감촉이 있는 소재를 사용하여 표현된 정보가, 아주 작게 집어넣어 존재감이 희박해진 정보보다 사람들에게 더욱 편안한 이용감과 만족을 줄지도 모른다.

결국 책의 매력은 물질로서의 매력이라고 말한다.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가상화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물질로서의 매력을 갖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미술, 교육, 스포츠 등.....

그 다음으로 무인양품의 컨셉을 잡는 기획에서 주격의 '-이'가 아닌 부사격의 '-으로'를 전면에 내세운다. 이게 무슨 말일까? '-이'는 개성과 기호, 자유의 가치를 드러낸다. 주체의 강력한 의지가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에고이즘을 만들어 불협화음을 발생시킨다.

결국 인류는 '-이'를 향하여 지나치게 줄달음치다 이제는 막다른 길에 들어선 것은 아닐까. 소비 사회도 개별 문화도 '-이'로 달음박질치다 세계의 벽에 가로막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으로' 속에 작용하는 '억제'나 '양보' 그리고 '한발 물러선 이성을 평가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으로'는 '-이'보다 한 수높은 자유의 형태가 아닐까. '-으로'에 포기나 작은 불만족이 포함되어 있을지 모르지만 '-으로'의 수준을 높인다면 포기나 작은 불만족을 완전히 덜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 '-으로'의 차원을 창조하여  자신만만하면서도 지혜로은 '이것으로 충분하다'를 실현하는 것. 그것이 바로 무인양품의 비전이다.

'-으로'는 '이것으로 충분하다'에서 나온 것이다. 무인양품의 비전은 양보와 억제 담은 것이다. 수준 높은 소박함이라고나 할까

마지막으로 무인양품의 광고에서는 지평선을 가져왔다. 왜 하필 지평선일까?

캠페인도 기본적으로는 동일한 사고방식을 따른다. 장대한 규모의 텅 빈 그릇으로서 '지평선'이 있는 사진을 사용했다. 지평선이란 아무것도 없는 영상이지만 그곳엔 반대로 모든 것이 있다고 할수있다. 눈에 보이는 하늘과 땅 모두를 바라보는 영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과 지구를 다루는 궁극적인 풍경이다. 앞에서 설명한 세계 합리 가치, 즉 앞으로 지구에 사는 사람들이 함께 젊어지고 가야 할 가치관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아니, 제시한다기보다 그런 생각을 담아내는 상징적인 영상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나온 광고가 아래의 광고이다. 시리즈라고 하는데, 이 책에는 이것만 나와서 이것만 가져와보았다.


책으로 읽을 때에는 지평선의 의미가 그냥 그렇구나 하고 이해만 했는데, 실제로 시각적으로 구현된 것을 보니 기획자의 의도를 느낄 수가 있을 것 같다. 인간과 지구를 나타내는 궁극의 풍경.

디자인 책이라서 디자인 자체의 세부적인 디테일이 많을 것 같았다. 물론 그런 얘기들도 많이 있었지만, 구체적인 디자인이 나오기 위한  발상과 컨셉,, 기획의 이야기가 나한테는 더 다가왔다. 이 책의 판본을 보니 2007년에 나온 책인데 2025년에 27쇄를 찍었다고 나와 있다. 이 얘기는 디자인을 하는 사람들한테 꾸준히 읽혀 온다는 얘기이고, 지은이의 생각이 시간이 지나도 유효하다는 이야기이다. 디자인을 내가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